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
이는,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실한 인생, 인생에 있어서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창조하지 않은 가치, 외부의 세간적인 가치는 죽음 앞에서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신의 생리적 욕구만 채우면 불만이 없는 반면, 인간은 생리적 욕구를 넘어,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반성, 질문. 그곳에서 모든 인간의 절망이 유래한다.
절망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것에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절망은, 개인의 성공과 행복에 관계없이 찾아온다. 키르케고르는 오히려, 행복과 성공의 중심에서 절망의 연기는 가장 격하게 피어오른다 주장했다. 이는 왜냐하면,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에 만족해, 자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죽음의 순간이 임박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가지기 위해 노력한 부와 명성 같은 세간의 가치는 죽음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자신이 진정으로 살고 싶었던 인생은 이런 게 아니었다며 절망한다.
따라서, 인간은 기존의 도덕과 가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가치의 수용자에서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 내는 창조자로 변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치의 창조자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변화와 자기 성장을 촉구해야 한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한 밧줄을 건너려는 자와 같다. 밧줄을 건너는 과정에서 인간은 끊임없는 자기 극복과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 자기 극복과 고통 속에서 여명 같은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있는 가능성만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는 아니다. 자연재해와, 천부적 장애, 가족과 국가, 민족과 전쟁 같은 것은, 주어지는 것들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 극복과 변화를 통해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과, 거스를 수 없는 운명, 필연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필연성의 힘은 결코 작지 않다. 아니, 어쩌면 가능성보다 클지도 모른다. 거대한 역사와 운명의 파도 속에서 한 인간의 영향력은 한낱 파도 속 거품 정도의 영향력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특히, 인간이 우주적 관점에서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부각함으로써, 인간이 만들어낸 세간적 가치의 전복을 실시한다. 니체 역시, 거대한 운명의 힘을 강조하며, 기존 가치를 파괴하지만, 이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위해서로, 가치 전복의 결과는 쇼펜하우어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니체는 영원회귀라는 사상을 통해, 전적인 운명의 수용, 운명애(Amor fati)를 강조한다. 니체는, 자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나의 삶, 나의 모든 선택들, 과거에 나에게 일어났던 끔찍한 일들과 현재 그리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미래, 이 모든 것들이 반복재생되는 비디오테이프처럼 끝나지 않고 영원히 반복된다 가정했을 때,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자신의 인생을 사랑할 수 있냐 물어본다.
세간의 가치를 부정하고 거대한 운명 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가치를 창조할 수 없는 허무주의자에게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은 바로 의미 없는 고통이다. 따라서, 허무주의자에게 인생은 고통으로 나타나며, 영원히 반복되는 인생이야 말로, 가장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필연성은 나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따라서, 필연성을 부정하며, 자기 자신이 되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필연성을 긍정할 때 비로소, 나의 모든 단점들은 장점이 되며, 내가 겪어온 고통들은 나의 개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운명에 대한 사랑, 끊임없는 변화와 자기 극복을 통한 힘에의 의지의 발산.
인간의 필연성과 가능성을 통합했을 때, 비로소 나는 나타난다.
운명애에 대한 예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파나소닉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3가지 은혜를 들고 싶다.
"나는 세 가지 하늘의 큰 은혜를 받고 태어났다.
첫째는, 가난함이고,
둘째는, 허약함이며,
셋째는, 못 배움이다.
가난한 덕분에, 나는 어려서부터 근면성실함의 가치를 알 수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허약하였기에 건강관리의 중요성을 알아, 장수할 수 있었다.
못 배웠기에, 다른 모든 사람이 나에겐 선생님으로서, 경청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