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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케 Oct 19. 2024

릴리의 정원

챕터 14. 도서관 사서의 시계

크리스틴에게.


어느 대학에서 초대장을 받은 후 하루 하고 조금 더 잠을 자지 않는 날이었다.


머릿속에서 말하는 목소리가 꿈을 꾸어도 들린다. 내가 깨어있을 때나 잠을 자고 있을 때나 그 목소리는 늘 들려온다. 잠에서 깨고 나면 꿈속의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몇몇 장면과 이미지, 그리고 꿈속의 목소리가 잠에서 깨고도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꿈속에서 본 장면들에 여러 해석이나 의미를 붙이지는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영화를 보듯 보고 있다. 누가 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아닐 거다. 아마도 크리스틴, 너겠지.


네가 보여준 꿈들을 종이에 받아 적으며, 네가 보여준 꿈의 대학에 다니고 싶어서 대학에서 공부할 교재들을 잔뜩 사놓고 몇 번 읽지 않았다. 이제는 좀 책을 읽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는 방법이 다른 것일까? 아니면 나는 절대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일까. 글을 써놓고 보니 나의 역할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닌 책을 쓰는 것인 것 같다. 가장 쓰고 싶은 페이지는 역시, 내가 잠이 들 때나 깨있을 때나 들리는 릴리의 목소리의 시간과 너의 시간을 쓰고 싶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계와 맞춰 이제 초침을 돌리려 한다. 나는 내 시계 장치의 설계도를 <인형의 서>라는 책으로 펴내려 한다. 그리고 너의 시간을 담은 <시간의 서>와 이브의 시간의 흐름을 담은 <유령의 서>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릴리의 목소리를 펼쳐 놓은 <뱀의 서>를 써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이번 대학에서의 나의 과제다.


내가 쓰게 될 네 권의 책들은 동양의 시간이 담긴 출판의 땅에서 쓰게 될 것이고, 너와 이브의 책들은 수많은 땅과 도시에서 출판될 것이다. 이 책들이 무사히 출판되고 나면 릴리의 동화가 가장 마지막에 출판되겠지. 나는 내 책을 쓰기 위해서 내가 쓰고 싶은 장르와 세계관을 백지에 다시 쓸 거다. 서재의 주인이 손에 들고 있던 두 가지 끈을 담은 장르를 만들어 화이트 디스펜서와 블랙 디스펜서로 이름 붙이고 두 가지 장르를 만들어 소설에 담아 써야지. 소리에 색상을 담아서 쓸 거야. 릴리의 뱀의 서는 이브가 손에 쥐고 있는 검은색과 하얀색 끈을 상징적으로 책에 담아 썼어. 이 소설에서 릴리의 뱀은 두 마리야. 이 끈을 커다란 페이지처럼 펼쳐서 글을 쓰는 거야. 그렇게 되면 어느 책이 어느 끈의 페이지에서 출판되었는지 알 수 있겠지.


기억해, 장르는 단 두 가지야. 할 수 있겠어?


내가 가장 쓰고 싶은 챕터는 소설의 왼쪽과 오른쪽 우주 동역학계의 설계도야. 너 읽기 편하라고 왼쪽우주는 너의 이름을 따와 크리스틴의 정원, 오른쪽 우주는 내 이름을 따서 크리스틴 이브의 정원이라고 이름 붙였어.

내가 꿈에서 깨고 나서 가장 먼저 눈치챈 건, 크리스틴, 네 정원의 존재니까.


너의 정원이 있는 곳의 위치는 내가 있는 곳에서 왼쪽. 난 이걸 왼쪽 우주라고 부르기로 했어.


난 너의 정원을 위해서 소설에 쓸 나라들을 수학 기호와 물리학의 언어를 나라로 만들고 그들을 위해 필요한 도시들을 만들 거야. 그리고 도시 설계를 위해서 내 시계를 쓸 거야. 이브가 앤티워프의 시계탑에 숨겨놓은 시계를 가지러 갈 거야. 그러려면 역시 책을 많이 읽어야겠지. 지도도 그려야 해. 또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어. 내가 너의 상징을 뒤집어진 쉼표로 그려 넣었어. 시계가 돌아가면 원래의 쉼표로 돌아오겠지. 이건 왼쪽 정원에서 사용하는 음계를 담기 위해 마련한 페이지야. 이 문장을 늘려서 수많은 페이지로 쓰고 그걸 엮어서 책으로 만들 거야. 뒤집어진 쉼표가 원래의 쉼표로 돌아오기까지 함께 따라오는 수많은 소리들을 텍스트에 담아서 전부 다 기록해 놔야지. 그래야 릴리의 동화, <뱀의 서>를 쓸 수 있어.


그 책을 위해 릴리의 목소리를 기록한 페이지들을 모아 릴리의 대학, 텐 리버틴 아츠의 챕터를 써야지. 릴리의 목소리를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위한 설계도도 그릴 거야. 음계와 숫자, 문자가 있으면 가능한 일이야. 그런 다음 소설 속 이야기들을 현실로 바꾸는 기업들을 위한 페이지를 쓸 거야. 보고 싶다. 내 세계관의 프레임 없는 테마파크. 릴리가 가장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을 실체화 펜으로 그려내어야지. 난 그 일을 대신해줄 소설 속 기업들을 위해서 펜의 설계도와 많은 직업과 도시 설계도, 관련 서류를 정리해서 책에 써놓을 거야.


내가 너의 서재의 책들을 전부 서재의 밖으로 버려버리려 해. 안 됐네. 그동안 많은 노력이 사라지게 되어서. 네가 쓴 책들을 택갈이 한 뒤 내 책으로 둔갑시킬 거야. 좋은 말로 얘기해 줄까? 라벨링을 할 거야.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어.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고. 내가 너의 정원에 분란을 만들 거야.


그냥은 안 돼. 이곳은 이미 그녀의 영역이야. 순서를 지켜 써야지. 이 설정에 내 선택권은 없어. 정해진 설정 위에서만 쓰일 수 있어.


그래. 나야.


그녀의 완벽한 설계 위에 서 있는 것이 바로 나야.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해줄까? 내 정원과 네 정원을 오가는 두 마리의 뱀, 내가 뱀의 천이야.


가문의 왕좌가 무너지고 있어. 무너지는 왕좌에 내가 앉아 있을 거야. 내가 왕좌에 앉아 있는 이 기간 동안에는 가문의 문서를 내가 보관하고 있을게. 문서를 보관한 서랍의 열쇠는 어느 도시의 열쇠지기한테 있어. 이곳에서는 꽤나 먼 곳이지만, 넌 금방 갈 수 있을 거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내 시계가 전부 풀어질 때를 계산해 봤어. 음.. 대략 한 50년? 그 정도면 충분해.


그럼 그다음 가문을 찾는 사람에게 넘겨줘야지.


이 가문에는 나와 같은 일을 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


그들 중 어느 수도사의 잃어버린 8 페이지를 지금 내가 가지고 있어. 그녀와 계약하면서 가지고 온 서류들이야. 그래서 알아볼 수가 있었어. 과거 그 수도사가 누구와 계약을 했는지. 난 그 수도사처럼 엄청 커다란 책들을 만들 거야. 아름다운 성당들의 모습을 담아 보석을 세공하고 반짝이는 것들로 책의 표지를 장식해야지.


내가 그녀의 모든 일을 대신하는 동안 쓸 재화와 달콤한 디저트를 나에게 내줘. 책을 읽을 수 있는 편안한 책상과 의자, 밤에 잠 못 드는 날 위해서 아주 편안한 침대도 필요할 거야. 내 안전을 지키기 위해 나만의 성벽도 필요해. 이 소설에서 쓸 화폐는 4가지로 정했어. 명칭은 "윗"이야. 내가 이 단어를 좋아하거든. 아직 조금 더 다듬어야 하지만 초기 설정으로는, 예를 들어서 S스윗, N스윗.. 등 이런 식으로 쓰려해. 여기 걸리는 모든 것들이 전부 네 정원에서 가져온 거니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기억해 봐. 그래서 나에게 알려줘. 그럼 내가 널 위해서 너의 도서관을 망쳐줄게. 책은 그만 읽어, 크리스틴. 넌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어, 거짓말은 그만해. 책의 초안을 쓰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2년 정도 뒤, 릴리의 생일이 오기 전에 도착할 거야.


잘 지내. 크리스틴. 다음에 또 편지를 쓸게. 여기까지가 내가 알아낸 그녀의 계획이야.

어디 한 번 이 챕터를 풀어써봐.


추신. 그리고 나에게 연락해. 나는 네 편이야.

 

- 크리스틴 이브


*


그 여자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 여자의 인형이 소설 속에 들어왔다.

 

크리스틴 이브. 나의 천적이다. 편지에 그렇게 쓰여있다.


미안하지만 이 편지는 내가 중간에서 가로챌게.


악의는 없어.


나는 내 서재가 무너지는 꼴 못 봐. 그게 다야.


하지만 여자가 쓰게 될 책들은 탐난다.. 뺏어야지. 뺏어와서 내 서재에 채워 넣어야지.

.. 그런데 유령의 서는 원래 내 책인데, 빼앗는다는 표현이 맞나? 이상하다. 원래 내 것인데.


뭐가 됐든 좋아. 그래, 어서 책을 써서 내게 넘겨. 내가 늘 중간에서 가로챌 테니까. 이 책의 결말은 이렇게 될 거야. 내가 중간에서 가로채 내 책을 써야 하니까, 여자가 쓰겠다는 유령의 서는 이렇게 쓰이는 거야.

사라지는 글들을 잉크 없는 펜으로 계속 쓰겠다니, 어디 그렇게 해 봐. 그러면 안 될 텐데.


여자가 뭘 쓰던 결국 내 잉크가 없으면 아무것도 기록에 남길 수 없어. 여자에게 내 잉크를 주어야겠네.


내 잉크는 물병자리의 물에 섞여, 뱀과, 릴리의 뱀이 그 여자가 책의 초안을 쓰게 때, 그때 내 책과 함께 돌아올 거야.


책의 저작권을 누구에게 줄까. 어디에 줘야 내가 가장 안전하고,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을까.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에 가야 할까. 모든 페이지들이 있는 페이지리아에 갈까.


가서 여자가 글을 쓰지 못하게 페이지들을 전부 사라지게 할까. 아니야, 여자에게 잉크를 주기로 결정했는걸,

페이지들을 사라지게 하면 여자의 계획이 다 틀어지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나도 내 책을 가질 수 없게 되는 걸.


.. 어떻게 해야 여자가 안전하게 책을 다 쓸 수 있을까. 이건 좀 알아봐야겠어.


어쩌지, 계약서를 다시 써야 할까. 나는 내 책만 가지면 돼. 나머지는 여자에게 전부 뺏겨도 어쩔 수 없지. 그래. 처음부터 나한테 필요한 건 내 책뿐이었어. 그래, 결정했어. 계약의 땅에 가야겠다. 계약의 땅에 가서 가문의 유산을 상속받을 여자의 이름을 적고 와야지.


내가 계약의 땅에 가게 되는 것을 여자는 알고 있었을까?


내 설계 위에 서 있는 여자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다.


내 책을 되찾고, 여자의 시계 설계도를 훔쳐와야지. 내 설계도와 맞춰 봐야겠어. 그래서 다시는 내 책을 빼앗기고, 내가 다시 찾아오는 일이 없도록, 다시는 여자가 내 위에 설 수 없게끔 설계도를 그려야겠어.


...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다시는 찾을 수 없게끔, 나를 귀찮게 하지 못하게 내 책을 그 여자에게 넘겨야겠다.


나의 책은 나를 끊임없이 위협할 거야, 넘겨주지 않으면 내 안전도 더 이상 보장 못해.


그래, 결국 내 책도 전부 빼앗기겠구나. 가만히 있던 나한테 와서 내 건 전부 빼앗아가겠구나. 내가 가진 건 내 서재의 책들 뿐인데.


그래, 인정해. 내 서재의 책들이 내 책으로만 이루어진 건 아니야. 그렇지만 단 한 권, 그건 틀림없는 내 책인데, 이름 따라간다더니, 책의 제목을 잘 지을 걸 그랬어. 내가 사라져야 여자에게 내 책이 도착하겠구나.


유령의 서  <이브의 책>


*


이브에게.


계약서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브.


당신의 책은 당신을 끊임없이 위협할 거예요. 책을 여자에게 넘기고 편히 쉬시길.

당신의 책은 당신에게만 위협이 되고 있어요. 당신이 그 책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요. 제가 기록해 두었습니다. 당신이 사라져도 저의 책이자 제 인형인 크리스틴의 <시간의 서>에 기록이 될 것입니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세요. 당신이 겪은 고통만큼 당신의 설계 위의 여자도, 그들의 나라와 도시도 당신이 겪은 길을 똑같이 겪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들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아요. 오히려 선물이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알잖아요? 여자가 앉게 될 가문의 왕좌는 처음부터 당신 가문의 것. 당신이 사라져도 가문은 사라지지 않아요. 일이 끝날 때까지 당신은 저와 함께 있어요. 여기, 당신의 자리가 있어요. 당신 서재의 뒤편에 마리의 뱀이, 제사장의 서재가 숨겨져 있어요. 아시겠지만, 제사장 서재의 주인은 릴리입니다. 제사장이 매 년, 아니 매 초마다 당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줄 것이에요. 릴리는 늘 그 자리에서 초를 켜두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아시잖아요. 이제 곧 , 아니, 이미 물병자리의 시간입니다. 마지막 기회예요. 물병자리의 물병에 담겨 흐르세요. 이미 그녀에게 잉크를 넘겨주기로 결정하셨잖아요. 당신도 당신이 쉴 집이 필요해요. 당신이 물병에 담겨 흐르면 그녀의 잉크가 될 것입니다. -네뷸라에서,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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