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 남겨진 인형들은 무언가를 찾는 듯 서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책상에 잠겨 있는 서랍을 발견했습니다. 빨간 인형이 자신의 펜으로 열쇠를 그려 자물쇠에 맞춰 돌려보았지만 돌아가지 않자, 이번에는 파란 인형이 열쇠를 돌려보았습니다. 여전히 맞지 않는 열쇠에 실망하고 있던 인형들 앞에서, 회색 인형은 서랍의 자물쇠와 똑같은 비눗방울처럼 투명한 자물쇠를 그려내어 서랍의 자물쇠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자 서랍의 자물쇠는 투명한 자물쇠에 맞춰 이내 사라졌습니다. 긴장감이 넘치던 서재에는 인형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인형들이 서랍 속 편지 봉투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낯선 남자가 서재에 들어와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아 오래된 타자기에 미처 쓰다 만 원고를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재빨리 커튼 뒤로 몸을 숨긴 인형들은 남자가 쓰는 원고를 커튼 뒤에서 바라보며 자신들만의 노트에 받아 적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원고를 작성하던 중 책상 서랍을 열어보려 했지만, 서랍은 닫혀 있었고, 인형들은 의아해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열었었는데
또다시 잠긴 서랍을 보고 인형들은 회색 인형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었습니다. 회색 인형은 투명한 자물쇠로 서랍을 복사해 자신들만 열어볼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고, 실제 서랍이 열린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인형들은 수긍했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잠긴 서랍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열리지 않자, 남자는 손에 힘이 빠진 듯 모든 걸 포기한 채. 고뇌에 빠진 남자는 머리를 감싸 쥐고는 '그래.. 그럼 그렇지, 시키는 대로 할게.' 읊조리듯 조용히 혼잣말을 했습니다. 남자는 책상 옆에 걸려 있던 샤워 가운을 가지고는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인형들은 남자가 써놓은 원고를 흥미롭게 읽은 후,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의 책을 타자기 옆에 두며 만족스러운 듯 뿌듯해했습니다. 회색 인형은 서랍 속에서 빼낸 편지 봉투를 열어 그 안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릴리가 포스트카드라고 적은 편지 봉투 안의 내용을 전부 다 읽자 편지 봉투는 사라졌습니다. 회색 인형은 다른 인형들에게 그 내용을 알려주어 인형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습니다. 인형들은 회색 인형에게 들은 내용을 토대로 재미난 일을 벌일 참인지 서재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자신들이 들은 내용을 현실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인형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들었고, 자신들이 고른 책을 남자가 써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서재의 주인이 돌아와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고, 창문 밖의 달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며 이내 창문을 열어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서재의 주인이 돌아온 순간부터 숨죽이고 지켜보던 인형들은 서재의 주인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방금 봤어?
-큰일이야. 죽은 거 아닐까?
-도와주러 가자
저희들끼리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서재의 주인을 따라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색색별로 잔상을 남기며 각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창문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단 한 명, 서재에 남은 인형이 있었습니다. 열린 창문을 닫고 커튼을 다시 치고, 어수선한 서재를 정리하는 회색 인형은 검은 인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하며 서재에 남아있었습니다. 서재에 남아있기로 한 회색 인형은 서재의 주인이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서재의 주인이 되어 남자에게 남자가 쓸 책의 원고를 미리 작성해 남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책을 매일 책상 위에 올려두곤 했습니다.
어느 날은 서재의 홀에 있는 전시장의 금서를 발견하고는, 읽고 싶어 져 전시장에서 금서를 꺼내 펼쳐봤다가 큰일이 났던 적도 있습니다. 금서의 잉크가 쏟아져 서재가 전부 검은색 잉크에 휩싸였었던 것이에요. 회색 인형은 잉크를 지우는 지우개를 펜으로 그려내어 잉크를 지우는데 한참을 할애했고, 금서를 다시 전시장에 넣어두곤 다시는 꺼내보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책 읽는 것을 좋아하던 회색 인형은 어쩌면 금서를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지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때, 남자가 서재로 다시 들어오더니 머리가 개운해진 듯, 책상에 다시 앉아 그새 새로 쌓인 책들을 바라보며 넋 나간 굳은 표정을 하곤 책을 읽고 원고를 작성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늘 서랍을 열고 싶어 했고, 열리지 않는 서랍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했지만, 열리지 않는 서랍보다 남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 안에 완성된 원고가 있다는 사실과 그 서랍이 열리는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회색인형은 검은인형을 기다리며 서재의 주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서재의 주인이 된 자신의 모습이 마치 남자가 서랍이 열리는 날을 기다리는 모습과 닮아있어 마음이 쓰였습니다.
서재의 주인이 돌아오며 필요 없어지는 자신의 존재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검은 인형을 기다리는 것은 회색 인형에게 잔인한 일이었습니다.
남자를 위해 서랍이 열리는 날을 알려주면 남자의 고통이 조금은 줄어들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고, 이내 서랍이 열리는 날을 계산해 보기로 했습니다.
-음계와 숫자, 문자만 있으면 구할 수 있어.
나한테는 쉬운 일이야. 자신 있어.
회색인형은 나름의 다짐을 하고는 그저 검은 인형을 기다리는 일과 서재의 주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그 역할을 맡는 것 대신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았습니다.
-서재의 주인 따위, 처음부터 하고 싶지 않았어. 차라리 돌아오지 마라, 차라리 절대 열리지 마라, 그렇게 내가 이 서재의 진짜 주인이 될 거야. 서재의 주인도, 검은 인형도 절대로 돌아올 수 없게, 진짜 서랍 따위 열리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 나야. 이건 내 능력이야, 다른 인형들에게 빼앗기려고 가지고 있는 능력이 아니야. 너희들 위한다고 서재 지키는 일 이제 안 해. 안 할 거야. 절대. 하지만 난 알아. 서재를 떠날 수는 없어. 그렇다면 나의 주인을 바꾸면 되는 일이야.
남자를 위해 살기로 한 회색 인형의 다짐은 다른 인형들에게 어떤 결과를 부를지 알면서도 선택한 자신을 용서하는 일을 빨간 인형과 파란 인형에게 떠넘겼습니다.
-이게 내 선택이야. 그리고 그건 여태까지 내가 짊어지고 있었던 원래 너희들의 몫이야. 잘해봐. 더는 그 누구도 기다리지 않을 거야, 더 이상 릴리의 금서는 읽지 않을 거야. 대신 나의 금서를 처음부터 다시 써줄게, 어디 한 번 읽어봐, 인형들아.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연기하는 거 이제 지겨워.
그래.. 이건 처음부터 나의 대사였어.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연기하는 거 이제 지겨워."
회색인형은 처음으로 담아두었던 한 문장을 입 밖에 꺼내었고, 회색 인형의 책이 처음 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책이 처음 써지는 순간, 회색 인형은 그 첫 문장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자신만의 책을 가지게 된 회색 인형은 책의 제목을 자신을 닮은 <유령의 서>라고 이름 지어 주곤 한 동안 그 책을 꼭 껴안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