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 전문성
'격물치지(格物致知)'
지식 교육에서는 최소한 교과의 지식이 학습자의 주관적 지식으로 체화(體化)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내적 체험이 결여된 단편적, 기능적 지식들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내가 가르쳤던 윤리 교과에 유교 철학에서 강조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사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하여 깊이 공부하고 연구하여(격물) 지식을 완전하게 습득하여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치지)을 의미합니다. 조선시대 가난한 유학자들이 밥을 굶으면서도 글만 읽었던 것도 이 사상에 기초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치지, 즉 통찰력도 얻고, 삶의 지혜도 얻고, 바른 삶에 대한 깨달음도 얻는 것을 추구하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치지, 즉 깨달음에 도달한 참된 선비를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교육은 그저 격물만 하도록 몰아치고 있을 뿐, 격물을 하는 궁극적 목적인 치지에는 조금도 미치지 못하는 미완성 교육일 뿐입니다. 그 결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져서는 안 되는, 그러나 자주 벌어지고 있는 해프닝들, 그것도 우리 사회 엘리트들이 주로 행하는 억지 행태들을 봐야 합니다.
지식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은 ‘깊이 있게’, 그리고 ‘다양한’ 관점이 필요합니다. ‘깊이 있게’라는 관점은 단순한 하나의 사실, 정보에도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나 배경에 따라 해석이 다양하거나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과서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규약이라고 불리는 조선 시대의 4대 향약도 양반계급들을 위한 고육책이라는 설(說)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칭송하는 자유, 평등을 모토로 한 프랑스혁명도 그 이면에는 철저히 남성 중심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루이 16세의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여성이 정치에 관여하고, 권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음란한 행위를 일삼았다는 포르노 그래픽적 참담한 누명을 쓰고 죽었다 합니다. 자유, 평등을 내세운 프랑스혁명에 참가하거나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던 쟁쟁한 여성들도 결국에는 정치에 참여했다는 이유에서, 또는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억울한 누명들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결국 평등을 강조했지만 그 평등은 남성들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양한’ 관점이란 콜럼버스의 위대한 신대륙 발견이라는 관점도 철저히 서구 중심적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몇천만 명의 원주민 학살이 있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비난을 받아도 모자라는 비참한 역사입니다. 또한 ‘Think different’, 즉 ‘다르게 생각하라.’는 유명한 Apple 사의 모토처럼 창의적인 사고도 포함합니다. 그 결과 애플사의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는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을 통해 인간의 감성을 움직인 핸드폰’을 우리들에게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교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고 지식은 학습자 자신이 어떤 관점에서 구성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줘야 합니다.
교육학에서 ‘깨달아진’ 학업성취만을 ‘참된 학업성취’(Authentic Achievement)라고 합니다. 이처럼 ‘가르친다’는 것은 ‘깊이 있게’, 그리고 ‘다양한’ 관점이라는 지식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을 통해 얻어지는 '깨달음’을 궁극적 목표로 해야 합니다. 한 시간, 한 학기, 또는 한 학년 등 수업의 한 단위로 책정된 시간이나 기간 동안에 의도한 깨달음에 도달해야 하고, 그 깨달음에는 최소한 지식에 대한 이해부터 지식 조작을 통한 고등 사고능력 발달, 더 나아가 고도의 창의적인 생성 등을 포함해야 합니다. 가장 낮은 단계인 지식을 ‘이해했다’ 혹은 ‘배웠다’하는 것조차도 항상 어느 구체적 상황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강의부터 문제해결 학습, 학습자의 자기주도적 학습 등 다양한 방법들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수업혁신은 내가 가르치는 방식이 아이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는가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는 ‘얼마나 많이 가르치느냐’보다 ‘어떻게 가르치느냐’로 수업의 프레임을 변화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내가 미국 학교에서 관찰한 한 영어수업에서는 여유로우면서도 진중한 자세로 문학책을 읽는 아이들, 그리고 어느 아이는 교사와 토론하는듯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정된 문학작품을 아이들 각자의 속도에 맞추어 읽어나가고, 읽은 내용 중 궁금하거나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교사에게 질문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 기간별로 정해진 일정량을 다 읽은 아이는 교사가 확인 겸 던지는 질문에 답하기도 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에 대하여는 교사와의 토론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우리 교과로 치면 국어의 본질을 제대로 살리고 있는, 그래서 아이들로 하여금 책을 찾게 하고, 책 읽는 것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런 수업이었습니다. 덕분에 이러한 수업을 받은 우리 딸아이도 지금도 틈만 나면 책을 잡습니다. 많은 양의 지식을 쏟아부어야 하는 우리 수업만 보다, 정해진 시간 없이 아이들 각자의 속도에 따라, 그리고 교과 본연의 목적을 살리면서 지식이 아닌 느낌이나 깨달음으로, 교사 중심이 아닌 학생 중심의 가장 바람직하면서도 여유 있는 수업형태를 본 것 같아서 뿌듯하면서도 부러웠습니다.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라는 책을 쓴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은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는 길, 삶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길,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해 문학을 강조했습니다. 캐나다 총리에게 101권의 책과 함께 책을 읽으라 권하는 편지를 보낸 형식을 빌려 모든 정치인들에게 문학을 읽지 않는 사람이 최고지도자라는 것 자체가 비극이라는 것을 역설합니다. 생기부 스펙을 채우기 위한 형식적인 독서만을 겨우 유지하고, 단지 시험만을 위한 단편적 지식 암기에 치우쳐있는 우리 교육의 폐해를 지적한 것 같기도 합니다. 실제로도 모 고등학교에서 골든벨을 울린, 그런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아주 엉뚱한 학생이 나왔습니다. 겨우 수많은 고등학교들 중 몇 학교만 울리는 그런 골든벨을, 내가 있는 지역에서 소위 명문고라고 부르는 남자고등학교와 여자고등학교가 합동 작전으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서 촬영했지만 울리지 못했던 골든벨을 말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모든 교사들이 깜짝 놀랄만한 학생이었습니다. 공부를 속된 말로 ‘되게’ 못하는, 하지만 그 친구는 교과서 공부는 못하지만 각 영역별 책들을 엄청 읽었던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과연 그 학생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요?
실제 전북 김제의 어느 여고에서는 아이들에게 3년 동안 최소 1백 권, 입시를 앞둔 3학년도 최소 2주에 한 권씩 읽게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규 교육과정 안에서 1주일에 2~3시간씩, 시험 뒤 방학 때까지 대부분 학교들의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는 2~3주 독서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교입니다. 덕분에 고교에 들어가지 못해 떠밀려온 아이들이 독서를 통해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하며, 그 결과로 이 시골학교의 진학률이 1백% 가깝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왜 알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단지 시험에 나오니까 무조건 외워야 하는, 그래서 공부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하는 미적분 계산하기, 소금물 농도 구하기, 잘 써먹지도 않는 어려운 영어 단어 외우기, 수많은 화학 원소들의 이름을 외우는 등 비실용적이고 무의미한 죽은 지식들을 외워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지금의 암기 교육, 입시교육을 과감히 탈피하여 각 교과별로 관련 서적을 읽고 토론하고, 그 내용을 경험케 하여 깨닫게 하는 학교, 이 정도의 학교면 아이들의 성장에 충분하고,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아예 우리도 국어 수업시간에 교과서 대신 우리 시대의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면 어떨까요? 작품의 일부분만 갖다 놓고 한정된 시간에 지루하게 억지 해석을 강요하는 일방적 수업보다는 진지한 수업 시간이 될 것입니다. 문학작품을 읽다 보면 매번 머리를 쥐어뜯을 필요 없이 편하게 읽으면서 부드럽게 넘어가기도 하고, 그러다 어려운 부분이 나타나면 잠깐 생각하기도 하고,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궁금해서 샘에게 질문해 보기도 하고... 이완과 긴장의 반복으로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지식 결여가 걱정된다면 그 안에서 시대적, 역사적 배경도 탐구해 보고, 지역들도, 인물들의 생각, 사상도 파악해 보는 등 알아보고 생각해 보는 수업을 진행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수업이 지금 우리가 바라는 통합 교육입니다. 문학 작품 감상이 아닌 시험문제를 대비하기 위하여 억지 해석을 암기하느라 골치 아픈 국어 수업, 그래서 오히려 책을 더 멀리하게 만드는 그런 수업이 아니라요. 이미 우리 아이들은 교과서 형태로 던져진 문학작품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는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미 수업 시간을 통해 책이란 골치 아픈 것이라는 인식을 세뇌시켜 놓고서는... 아쉽습니다.
아이들이 가장 힘들어하고 지겨워하는 수학 과목에서, 특히 어차피 해도 안 된다고 체념하고 있는 수포자 아이들에게 암기 위주의 기존 교과서에서 벗어나 즐거운 수학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들도 있습니다. 교과서 대신 (사)사교육걱정 없는 세상 등 38명의 현직 교사 집필진이 제작한 대안 교과서 <수학의 발견>을 중학교 수업에 사용하는 학교가 소개되었습니다. 토론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대안 교과서를 구성한 매우 유의미한 접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대안 교과서를 사용하는 교사는 기존 주입식·암기식 교수법보다는 문제 풀이 과정 자체를 교실에서 토론하는 수업방식으로의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작은 모둠을 이뤄 교과서 문제를 탐험하듯 풀어나가는 방식입니다. 정답을 찾는 수업이 아니라,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중시함으로써 수학적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고교 현장에서도 수학 단편영화 만들기 등을 통해 어려운 미적분까지 소화해 내게 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하는 수업까지 진행합니다.
수학조차도 탐구하며 토론식 수업으로 진행 가능하다는 것은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게 해 줍니다. 그래서 나는 재미없고, 어렵고, 추상적인, 그리고 현실과 별 연관성이 없는 그런 파편화된 지식들로 가득 찬 교과서를 공부하기보다는 차라리 12년 동안 각 교과별로 관련된 최신 서적들을 엄선하여 독서하고 토론하여 관련 지식도 쌓고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면 지금의 안 하느니 보다 못한 교육보다 몇백 배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역사를 교과서 지식으로 배우기도 하지만 독서를 통해 단편적인 사실 습득을 넘어 역사적 상황에 동화되어 더 깊게 배울 수가 있는 것이고 인간적인 성장까지 동반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랬다면 지금 우리의 아이들이 다양한 삶 전체를 조망하고 구체적 사건을 분석할 수 있는 현명한 눈을 갖게 해주는 동시에,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며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인간적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입니다.
이처럼 교과의 본질에 충실해야 된다는 말은 교과서의 내용만을 강조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교과가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본질을 폭넓고 유의미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그리고 자극적인 매스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는 지금의 아이들에게 지식 전달 위주의 고리타분한 수업은 학습에 대한 아이들의 거부감을 더욱 증폭시킬 뿐입니다. 이러니 교사의 재량과 능력으로 교과서가 있어도 사용하지 않거나, 교과서를 단지 참고 자료로 이용하고 현실성이 넘치는 다양한 자료들을 포함하여 교과나 주제를 탐구하는 선진국의 수업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육 선진 국가들에서 교과서는 어디까지나 교재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있고, 요약해서 가르쳐도 되고 꼭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들에게 교과서는 교사와 학생의 인격적 성장을 위한 교육적 수단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과 교사들은 자발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교과 미팅을 갖습니다. 별 일없을 때는 그냥 모여서 커피 한잔 하며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매번 교과와 관련된 의미 있는 논의를 하기도 합니다. 교과와 관련된 활동을 계획하고, 점검하고, 수업 참관도 해보고, 평가도 같이 생각해 보기도 하고... 이런 모임만 지속될 수 있다면 교사들 간 의미 있게 수업 자료를 선별하고, 구성하고, 교수방법까지 논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다음 회차부터는 수업 혁신의 핵심 요소인 수업의 내용과 수업방식에 관하여, 즉 수업의 궁극적 목표인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아래의 질문들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접근을 전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당신의 교과에서 아이들에게 무용한 지식들은 무엇입니까?
- 당신의 교과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하면서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없습니까?
- 당신은 아이들에게 삶에 필요한 능력과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유용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까?
- 당신은 민주 사회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함양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까?
- 당신은 교과 내용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깨달음을 얻게 하고 있습니까?
- 당신의 교과 평가 방식은 위의 질문들을 충족하기 위하여 어떤 방식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