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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2: 모두 교사 탓이다

by 무상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데

교육은 교육이 아니고

스승은 스승이 아니고

제자는 제자가 아니다

학교는 학교가 아니다

교육은 교육이고

학교는 학교인 때는

언제쯤인고?

........

장관은 홍익인간을 부르고

교육감은 창의적인 인간을 찾는데

교장은 달 보고 웃고

벽시계는 돌고 돌아

하학종을 울린다

...

...

지구에서는 지구별이 안 보이고

서울에서는 서울이 안 보인다

제자는 있는데 스승이 안 보이고

스승은 있는데 제자가 안 보이고

학교는 있는데 교육이 안 보인단다.


언제, 어디서 베껴놓은 것인지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김영길 퇴임 교장샘의 시집인듯합니다. 암담한 우리 교육의 실태를 제대로 반영했다 싶어서 일부 옮겨보았습니다. OECD 국가 중 10대들의 학업성취도는 최상위권이지만 삶의 만족도는 하위권이면서 자살률도 1위인 나라, 우울증 의심 56%.... 우리들의 암울한 통계치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PISA 순위 최상위권인 핀란드는 학력과 학습 흥미·동기, 삶의 만족도가 모두 높은 반면, 우리는 학력만 높고 학습 흥미·동기, 삶의 만족도가 최하위권이라는 것입니다. 80.8 %의 아이들이 '사활을 건 전장'으로 표현하는 고등학교에서 당연히 행복도는 주요 조사국 중 꼴찌를 기록하는 나라, 결과적으로 자퇴율, 더 나아가 자살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는 잘하는데 행복하지 않은 아이들, 수능 잘못 봤다고 목숨을 끊고, 하다못해 자율형 사립고에서 전교 1등도 했던 고교생이 목숨을 끊는 등 모범생도 ‘1등 콤플렉스’에 쫓기기도 합니다.


'교육은 교육이 아니고... 학교는 학교가 아니다'라는 위의 교장샘 표현 그대로 벌어지는 비참한 상황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 아름답다는 학창 시절의 의미, 그리고 교육적 성장은 유보, 또는 정지되며 대학 진학 이후로 미루어집니다. 우리 아이들은 대학 입시가 끝날 때까지 올리고 올려도 다시 굴러 떨어지고 마는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학창 시절 내내 매일매일을 ‘입시’라는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곡된 입시제도로 인해 모든 것이 뒤틀어진 학교 현장에서 결과적으로 아이들이 지쳐가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겨우 버티어낸 아이들도 내가 보기에는 비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육 실태를 고발하고자 직접 UN 위원회 찾아간 고등학생도 있다고 하는데... 참 어이없는 현실입니다.


경이로운 것은 그럼에도 현재의 교육시스템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1도 없이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 우리 사회를 책임질 건강한 사회구성원을 길러내야 하는 분야인데 왜 이렇게 무감각한 지 참 놀랍기만 합니다. 아이들이 자퇴하려고 하고, 목숨을 끊고, 최근에도 잘못 성장한 엘리트들이 자기 자신만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우리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가는 일들이 수시로 벌어지는데도 무엇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보이질 않습니다.



'모두 우리 탓이야. 교사 탓. '

오늘도 매주 모임을 하는 동료교사들과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엘리트들의 모습과 그들이 벌이는 억지 해프닝들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한탄을 합니다. 특히 우리 사회 잘못된 어른들의 모습을 비판할 때 내가 동료들에게 농담반, 진담반의 심정으로 내뱉는 소리입니다. 위의 시에서 언급한 '스승이 안 보인다'라는 한탄과 같은 맥락입니다. 친구가 지금 현재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엘리트 인물들 중에 자기가 근무했던 학교의 제자도 있다며 동감을 표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학교를 거쳐 성장합니다. 그것도 최소 하루의 2/3를 학교에서 보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들을 지도하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잘못되었다면, 그리고 사회에서 존경할만한 진정한 어른이 없다고 한다면 다른 원인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모두 우리 교사 탓으로 볼 수 있으며, 교육을 수행하는 교사들 책임입니다. 학교를 둘러싼 입시 제도나 학교 외적인 변인들은 차치하고 아이들이 잘못 성장한 것도,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것도 교사들의 지도가 적절하지 못했거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맡은 아이들을 못난 어른으로 성장시킨 것도 그네들이 거쳐 간 학교에서의 교사 탓이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고생하고 힘들어하는 것도 교사 탓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 교육 여건으로 오롯이 아이들에게만 집중하지 못하는 교사 나름 변명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입시제도라는 괴물에 의해, 그리고 이 괴물이 던져놓은 억지 틀 안에서 교육다운 교육을 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녀야만 하는 학교요, 교사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교사들은 교육적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기회도 제공받지 못해 ‘교육적’이라는 개념마저도 인지하지 못한 채 주먹구구식 경험과 좁은 식견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사들이 관료주의적인 행정 시스템에 치여 아이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여유도 확보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쫓겨 다닙니다.


또한 우리는 교직 경력이 쌓일수록 교사의 전문성, 자율성에 대한 의식이 점점 희박해져 갑니다. 교육과정과 수업내용, 평가 방식 등을 결정할 수 있는 교사의 자율성은 철저히 무시되어 적극적인 의욕을 보일 수 없게 됩니다. 제도가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사 경륜이 쌓여가면서 더 애착이 붙고, 소신이 강해지고, 전문적 능력이 더 향상되어 자율성을 맘껏 발휘해야 하는 게 정상이건만 오히려 초임교사 때 가졌던 열정조차도 점차 삭히고 피동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우리 교사들의 실정입니다. 특히, 전문성 향상은커녕 가르치는 것에만 전념할 수 없는 교사를 둘러싼 교육여건에도 지쳤습니다. 학교 자치는커녕 부수적으로 학교와 교사들을 옥죄는 행정적, 제도적 제약들로 인하여 학교와 교사의 역할에 대한 본말이 왜곡되고 전도되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교사들, 그리고 아이들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입시'만을 대비하기 위한 교육에서 벗어나 핀란드처럼 '행복하게 살기'위한 교육으로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학교에서 하는 공부와 활동만으로 우리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면서 입시도 대처할 수 있는, 그리고 교사들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본업에만 충실할 수 있도록 교육개혁의 기본 프레임을 다시 짜야합니다. 문제풀이 시험에 쫓기지 않고 교과 본연의 수업에 충실함으로써 아이들에게 배우는 맛을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느리고 낮은 수준의 학습(slow & low learning)으로 모든 수준의 아이들이 흥미를 가지고 수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학교 수업이 좀 더 여유가 있어야 하고, 배우고 스스로 주도하는 학습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 오는 것이 즐거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전문가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민주시민 사회의 구성원을 길러내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육의 본연을 회복하는 길이며,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교사들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역으로 위에서 언급한 문제점 해결과 여건 개선이 될지라도, 과연 어느 정도의 우리 교사들이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책임지고 해내는 핀란드 교사들처럼 해낼 수 있는지 걱정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도와 여건 탓만 하고 있는 일부 교사,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제대로 답할 수 있는지 던져 봅니다.

'나는 교육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알고, 행하고 있는가?'

'나는 아이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교육 활동을 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맡고 있는 아이들과 30분 이상을 상담하고 대화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아이들이 욕구와 필요를 제대로 알고, 이에 맞게 대처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나는 우리 아이들의 인격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나는 단순 지식 주입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지적 성장을 위한 수업과 평가를 하고 있는가?'

...............

...............


모두 교사라는 ‘업(業)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단순 교사가 아닌 '스승'으로서 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앞에서 기업이 이익을 추구하는 일터라면, 학교는 ‘교육’을 추구하는 일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직장인도 같은 경우이겠지만, 특히 교사는 자신이 선택한 직업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즉 존재 이유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즉, 다른 어떤 기준들 보다도 ‘교육적’이라는 기준을 최우선으로 아이들의 바람직한 성장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자 하는 ‘업(業)의 본질’에 대한 인식입니다. 스승이 없다는 말은 자신의 '업(業)'에만 몸을 담그고 그저 의례적으로 일을 할 뿐, ‘업(業)의 본질’은 아예 인식하지 못하거나,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입니다. 그저 학교라는 직장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으로 전력을 다하는 교사, 즉 '스승'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육, 그리고 아이들과 연관된 모든 영역에서 교사들의 교육적 의식과 전문성이 먼저 살아있지 않으면 아무리 제도나 여건이 충족될지라도 그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핀란드 교육이 '행복한 교육'을 하면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는 그 중심에는 교사들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샘, 퇴임하신다면서요..'

한 무리의 아이들이 어설프게 교무실을 들어오면서 정년퇴임을 앞둔 교사에게 인사를 합니다. 샘에게 인사를 하는 것 자체도 익숙지 않은 듯 엉거주춤 아주 낯설고 어색한 모습들입니다. 아이들이 돌아간 후 '교사들에게 무지렁이 취급받던 말썽꾸리기 아이들이다.'라는 말을 해줍니다. 그 말을 들으니 아이들의 어색한 모습이 이해가 됩니다. 교사들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방치된 채 떠돌던 아이들이 자신들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해주었던 교사에게는 그동안 감사한 마음이라도 전달하고 보내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용기 내어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이런 교사가 있었다는 게 참 다행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아이들조차도 진정한 교사들을 먼저 알아보고 무한한 신뢰와 존경심을 보여줍니다. 역으로 내 주변의 아이들에게 인정과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아이들이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면, 아이들 탓하고 여건 탓하기 전에 모두 내 탓이 아닌가 먼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교사가 아이들에게 인정받고 존중받고, 그래서 아이들을 제대로 성장시키는 과정은 교사라는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사로서 갖추어야 하는 인격적 자질과 전문적 능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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