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글 공모와 관련하여 글 쓰는 모든 분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줄 겸 미국에서 공부할 때 식겁한 경험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학점을 줄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대학원 과정 마지막 학기를 다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귀국 준비를 하던 중 강의 들었던 한 교수가 전화를 해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합니다.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얼마나 힘들게 버텨서 끝낸 과정인데, 더구나 더 기회도 없는 마지막 학기에서 학점을 안 주겠다니.... 한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거치고 미국에 왔지만 미국의 대학원은 'T.G.I. Friday (Thanks God it's Friday)!!', 즉, '진짜 금요일이구나!!'를 절감할 정도로 빡센 수업과 과제물에 정신없이 끌려다녀야 하는 일주일 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일주일을 정신없이 버티다 금요일 저녁에 모여서 운동 한 게임하고 술 한잔 하며 일주일 쌓인 피로와 학업 스트레스를 풉니다. 그리고 다시 토요일 늦게 일어나 그때부터 다시 일주일 수업을 대비합니다. 나도 처음이 아닌 대학원 과정인데도 짧은 휴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저 한 학기 빨리 끝나서 방학만 기다리던 그런 끔찍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버틴 대학원 마지막 학기, 한 강좌에서 학점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제출한 기말 레포드 10여 쪽 내용에서 교수가 말한 강의 내용을 출처 언급 없이 한 줄 조금 넘게 제시한 것이 표절이자 저작권 침해라는 것입니다. 나도 뜨끔했습니다. 교수의 강의 내용 중 유독 의미 있게 다가 온 말이었기에 머릿속에 담아두었다가 내가 의도적으로 리포트에 녹여서 기술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리포트를 쓰면서도 '이걸 써도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는 하였지만, 리포트 결말에서 내 주장으로 쓴 것도 아니고 단지 본론 부분의 사실 진술로 나름 적절히 녹여서 썼었고, 그것도 겨우 한 줄 조금 넘는 분량이었습니다. 물론 광고 카피같이 비록 몇 개 단어일지라도 창작성이 높고 독창적인 표현을 그대로 썼다면 표절이자 저작권 침해라 하지만, 단지 강의 내용을, 그것도 극히 일부를 녹여 썼을 뿐인데 이 정도를 저작권 침해로 본다고?
하지만 담당 교수의 강경한 통보에 저작권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이 정도를 저작권 침해로 볼 수 있는지 교수에게 따져볼 겨를 조차 없었습니다. 단지 하얘진 머릿속에는 '이를 어찌 대처하나?' 하는 걱정만 뱅뱅 맴돌고 있었습니다. 순간 개인적으로 학회에 제출하고자 쓰고 있던 소논문이 퍼뜩 떠올라 교수에게 이것으로 다시 제출하면 어떠냐 하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교수가 그 의견을 받아들여, 살펴보고 성적 심의위원회에서 논의한 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다행히 학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몇 십 년이 지닌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합니다. 저작권법에서 가장 핵심적인 침해 유형인 '복제권 침해'에 해당하는 경우였습니다.
반면 우리 사회에서는 알만한 사람들에 의한 도덕적, 학문적 윤리 위반을 당연시하는 표절, 저작권 침해 논란이 자주 일고 있습니다. 특히 쟁쟁한 교수 경력을 가진 분들이 자주 표절, 저작권 침해 의혹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이분들 대부분이 외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거쳤던 분들이고, 리포트나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나름 내가 가졌던 경험과 유사한 엄격함을 겪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의심받는 행태를 문제의식 없이 자행하는 경우를 보면 표절임을 알고서도 '나는 이 정도는 괜찮아'라는 무례한 자신감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어 참 씁쓸하기만 합니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 사상가들이 주장하듯 저작권마저 강자들에 의해 맘대로 침해당하고, 그래서 창작자의 권리, 그리고 삶까지 무시당하는 그런 나라가 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