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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맛과 철학 Aug 19. 2024

우리가 밥을 비벼먹는 이유

비빔밥의 역사와 유래

한옥마을 출처 웹사이트 전주한옥마을

지난 주 전주 방문했다. 전주는 한옥, 한복 등 한국의 ‘색깔’이 돋보이는 우리 나라 주요 관광지 중 하나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은 단연 비빔밥이다. 어떻게 전주는 비빔밥으로 유명해졌을까? 비빔밥은 어떤 이유로 탄생했을까? 오늘은 비빔밥의 역사와 한국의 식문화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전주비빔밥 출처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비빔밥은 오색찬란한 나물 반찬을 한 곳에 담아 비벼 먹는 한국의 전통식이다. 놋그릇이나 돌솥에 담겨 정돈된 모습으로 제공되며, 보는 즐거움이 맛보는 즐거움보다 앞선다고도 할 수 있다. 비빔밥은 그 맛이 훌륭해 외국인들도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으며, 이 때문에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컨텐츠 중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전주에서 비빔밥을 즐기는 외국인들을 많이 보았으며,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홍어와 김치 출처 국가유산청


한국은 바다로 둘러싸인 환경과 생물 다양성 덕분에 다양한 식문화가 발달했다. 우리 선조들은 홍어, 청국장과 같은 발효 음식부터 복어, 김, 개불, 미더덕, 멍게 등 먹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활용해 식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이러한 음식 문화는 주변 강대국의 침략과 힘든 시절을 겪으며 형성되었다. 이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한국 특유의 음식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특색 있는 식문화가 외국인에게는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 심지어 김치조차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낯설 수 있다. 하물며 홍어나 청국장은 글로벌한 한류 문화에서 소화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비빔밥 기내식 출처 대한항공

비빔밥은 이와 달리 거부감 없는 맛과 범용성으로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실제로 비빔밥은 한류 문화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TV 프로그램 '윤식당'과 '서진이네'에서는 해외에서 비빔밥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국내 항공사는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런 비빔밥의 고급화 이면에는 한국 문화의 경쟁력을 높이려는 많은 노력이 있다.


몇몇 사람들은 비빔밥이 고급 음식이 되어버려 싫어하기도 한다. 전주에 도착했을 때 만난 택시 기사는 "비빔밥 하나에 왜 18,000원이나 하냐, 순 사기다!"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전주 사람들은 비빔밥보다 콩나물국밥을 더 자주 먹는다고 한다. 비빔밥이 고급화되고 전주가 관광지화 되었다는 것이 문제라는 의견도 있다.


양푼비빔밥 출처 오마이뉴스


각종 나물을 한데 넣고 비벼먹는 비빔밥. 한국 사람이라면 고급 음식이라는 생각보다, 집에 남아 있는 각종 나물과 반찬을 섞어서 양푼이에 비벼먹는 간편하고 친근한 음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런 친근한 음식이 한 그릇에 만 원이 넘는 고급 음식으로 판매되는 것을 보면 거부감이 들만도 하다. 그럼 비빔밥은 귀한 음식이 아닌가? 맞다. 처음의 비빔밥은 귀한 음식이 아니었다. 비빔밥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유는 없지만 유력한 몇 가지 가설들이 있다.


밤을 세우던 조상들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오래전부터 한국과 그 근처의 여러 나라들은 서구와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날짜는 주로 음력을 사용했으며, 이는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닌 달을 기준으로 날을 세는 방식이다. 이러한 음력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날에는 잠을 자지 않는 “수세”라는 풍습이 있었다. 선조들은 집안의 모든 등불을 켜두고 새벽에 닭이 울어야 잠에 들었다. 그들은 섣달 그믐날 잠을 자면 죽거나 죽음과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믿음은 도교적인 가치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선조들은 한 해와 그 다음 해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인식했고 그 생각이 그 두 해를 연결하기 위해 밤을 세워야 한다는 것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수세의 풍속과 가치관은 생활양식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섣달 그믐날은 한 해를 결산하는 마지막 날이므로 밀린 빚이 있으면 이날 안에 갚고, 돈도 꾸지 않는다. 섣달에는 큰 물건을 사지 않으며 혼인도 치르지 않고 연장도 빌려주지 않았다. 그 달은 “매사를 정리하는 달”이었다.


골동반 출처 농촌진흥청


수세의 풍속은 단연 음식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임금의 음식을 차리던 수라간에도 섣달 그믐날이면 수라간의 음식을 한데 모아서 음식을 올렸다. 밥에 여러 볶은 채소와 고기, 다시마튀각 등을 넣고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어 비벼 한 그릇에 담고 달걀지단과 고기완자 등의 고명을 올리는 음식이다. 이러한 기록은 『시의전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골동반(骨董飯)”, 한글로는 “부븸밥”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비빔밥의 기원이라는 것이 주요 가설이다.


5첩반상 상차림 예시 출처 국가유산청


학자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식사 방식인 독상(외상) 문화도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사람마다 각각 한 상을 받는 문화가 있었고, 겸상하는 경우는 아버지와 자식과 같이 일부의 경우만 허용되었다. 아무래도 신분제 사회에서는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 수평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쉽고 위계질서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독상문화는 밭에 나가서 먹는 점심과 같은 "새참"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평민들은 주로 국수로 가볍게 점심을 떼웠고 아침과 저녁을 많이 먹은 기록이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밥에 여러 재료를 넣고 비벼서 한번에 나가는 비빔밥은 매우 적합했으며 한국의 전통식 중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경기전의 태조 이성계 어전(임금의 초상화)


전주는 조선 왕조가 시작된 곳이라는 특수성이 있는 지역이다. 그리고 200여 년 전부터 이미 비빔밥을 즐겨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으로 비빔밥이 유명해졌을 수도 있다. 또 삼성의 이병철 전 회장이 전주 중앙회관의 비빔밥 맛을 보고 반해서 신세계백화점 본점 식품관에 분점을 차릴 것을 제안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설도 있다. 필자는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비빔밥하면 전주, 전주하면 비빔밥이라는 인식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전주의 비빔밥 축제 출처 전북도민일보


지금까지 비빔밥이 고급화되고 컨텐츠화하는 데는 정부와 많은 기관들이 다년간 노력했다. 전주시에서는 표준 레시피를 제정하고 이를 준수하는 식당에만 인증을 부여하는 등 관리에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러 유명인들이 적극적으로 비빔밥을 홍보하고 요리사들은 각 나라에 맞춰 커스터마이징을 하기도 한다. 이는 비빔밥이 가진 특유의 유연성과 친화력 덕분이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TV 프로그램 '서진이네'에서는 비빔밥을 덜 맵게 하기 위해 고추장 함량을 낮추고 파프리카로 색을 내기도 했다.


고급 음식이 된 비빔밥을 누군가는 비싸고 거품이 낀 음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필자는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오랜 세월 비빔밥을 먹어온 전주의 역사를 보면, 한 그릇에 만 오천원이 넘는 가격이 결코 비싼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밥그릇에 대충 비벼먹던 비빔밥, 그 속에는 한 해와 그 다음 해를 구분지어 생각하던 선조들의 수세적 가치관과 위계질서가 엄격했던 예절관, 그리고 배고프고 서러웠던 시절 무엇이든 먹어야 했던 '한'이 녹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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