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와 어른의 경계에 있던 나의 19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나날들
고3이 되던 겨울, 아마도 2월 어느날이었을 것이다.
옆에서 엄마는 운전을 하고 있었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깜깜한 밤이었던게 기억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날의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이 아니었을까 싶다. 보통은 통학버스나 학원 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수험생의 특권으로 가끔 엄마가 픽업을 해 주시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 엄마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가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무려 6개월이나 되었다는 이야기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당시 내게는 이미 고1 동생이 있었다. 부모님, 나, 동생. 우리 가족은 계속 이렇게 4인가족일 줄 알았다. 그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나는 당시 공부하던 교과서의 내용들(아마도 과학이나 기술가정 시간에 배운 내용들이지 않았을까 싶다.)을 떠올렸던 것 같다. 성염색체, 낙태, 피임이나 양수검사 이런 내용들. 지극히 수험생답지 않은가?
알고보니 엄마는 6개월이 될 때 까지도 본인의 임신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두 명의 고등학생 자녀를 두고 50이 가까워 오는 나이에, 한번도 실수(?) 한 적이 없었던 중년 아줌마에게 갑자기 임신이라니. 그냥 몸이 좀 안좋고, 살이 좀 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나보다 더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훌륭한 인품의 부모님은 곧 마음을 다잡고, 아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 믿으며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렇게 나는 18살 터울의 막냇동생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는, 내게 그 사실이 전혀 축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당시 나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있었다. 불안한 집안의 경제상황, 부모님의 잦은 갈등, 아버지의 암 투병 등을 겪으면서 마음속에 불안이 자라났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취업을 빨리 할 수 있는 지극히 안정적인 학과와 직업을 희망하며 밤낮없이 공부에 매달리는 수험생이었다. 그런 나의 인생에 18살 터울의 막냇동생은 마치 내 인생에 느닷없이 나타난 초대받지 못한 손님 같은 것이었다. 이 사실이 너무나 '평범하지 않다' 라고 느꼈던 것 같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나 신경쓰는 사람이었고, 아직 아무도 하지 않은 손가락질이 벌써부터 무서웠다.
점점 배가 불러오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외면하고 싶었고,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부끄러웠다. 지금은 부끄러워했던 그때의 내 자신이 부끄럽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래서 한번도 엄마의 배를 만져본 적이 없었다. 그에 비해 내 바로 밑의 동생은 자기보다 동생이 생기는 사실이 마냥 좋고 신기했는지 엄마 배를 만지며 태동을 함께 느끼고는 했다.
그렇게 수능을 몇달 앞둔 어느 날 막냇동생이 세상에 나왔다.
그때 내 성적은 계속 오르고 있었고, 학교에서 가장 높은 성적의 학생들이 사용하는 자습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세상에 나오는 막냇동생을 응원하지 못했던 내 마음과 달리, 막냇동생은 수험생인 나를 응원하면서 세상에 나왔나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밖에서 공부하고 집에서 잠만 자는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그리고 막냇동생이 100일쯤 되었던 어느날, 거실에 앉아있던 나에게 엄마가 임신 소식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을 이야기 했다. 막냇동생이 평생 고칠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화가 다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솔직한 마음으로 내가 동생을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엉엉 울었던 것은 기억난다. 아빠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던 날보다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아빠는 다행히 후에 완치 판정을 받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의 행동들 중에 이유를 뒤늦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엄마가 임신중일 때 내가 한번은, 양수검사를 했냐고 물은적이 있다. (기술가정 책에서 봤으니까 당연히 해야하는 검사인줄 알았다! 참 순수했다.) 엄마가 그걸 왜 하냐며, 엄마는 그런거 안한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나는 당시에는 이유를 몰랐지만 한참 뒤에 양수검사가 보통 기형아 검사를 위해 시행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령의 산모였던 엄마는 그 누구보다 '고위험군'이었을텐데, 상관 없이 아이를 낳기로 결정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막내가 태어난지 얼마 안됐을 때(아직 장애 사실을 나만 몰랐을 때) 내 딴에는 정을 좀 붙여보겠다고, 막내한테 나중에 어떤 공부를 어떻게 잘 할 수 있도록 가르쳐줄 것이며... 따위의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를 듣던 엄마가 꼭 공부를 잘 해야 하냐며 핀잔을 주었던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뼈가 있는 말이었다.
내 바로 밑의 동생은 나보다 먼저 장애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생이 생긴 자체를 기뻐하는 애였으니 엄마로서는 말하기가 더 수월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랑 다르게 다른 사람 시선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엄마의 마음을 이제 와서 헤아려보자면, 동생이 생긴 것 자체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에게 더한 것을 받아들이도록 해야하는 그 마음이 정말이지 무거웠을 것이다. 그래서 100일이나 지나서야 첫째인 나에게 힘들게 입을 열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수능을 몇 달 앞둔 어느날, 비장애 형제가 되었다.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