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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란 Aug 29. 2024

내가 김밥이라도 사다줄까?

아플 자격이 없는 직장인

"정말 미안한데 오늘 점약 취소해도 될까?”

아침 11시가 넘은 시간. 동기언니와의 점심약속이 파토났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나에게는 같은 시기 입사한 30여 명의 동기들이 있다. 교육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참 어색했는데. 

비슷한 또래끼리 지내던 대학교와는 또 다른 서먹함. 대충 살펴봐도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나이도 학교도 뭐 하나 겹치는 게 없던 우리는 그저 같이 입사했다는 사실 하나로 공감대를 쌓고 금세 친해졌다. 동병상련의 정이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특히 연수원에서 같은 팀이었던 멤버들과는 절친이 되었다. 나의 메신저 짝꿍들.

그런데 동기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한창 욜로가 유행하던 시절 꿈을 이루겠다며 뛰쳐나가기도 하고 뜬금없이 이직을 하거나 말없이 고향으로 내려간 케이스도 있고. 그들이 떠날 때마다 한 번씩 마음이 요동쳤지만 여전히 여기에 따개비처럼 남아있는 나와 동기들은 서로의 숨통을 트여주는 사이다. 

든든해. 아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처음에는 대체 면접은 어떻게 통과한 건지 의아한 인성빌런들이 문제였다. 제발 조용히 좀 다녀. 같이 입사했다는 이유로 그들과 한통속으로 묶여 폐급이라 불리는 처지에 짜증이 났다. 그래도 나머지는 좋잖아. 그럼 됐지. 그런데 영원할 것 같던 우리도 서서히 변해갔다. 일적으로 틀어지고 승진으로 벌어지고. 커플들? 진작 다 깨졌지. 너무나 회사스러운 현실이다. 다 그런거지 뭐. 하지만 가끔씩 추천으로 뜨는 옛 사진 속 우리 모습이 씁쓸하다.


점약을 취소한 언니가 아침부터 몸살기가 있단다. 

“에구. 아프면 좀 쉬지.” 

하긴 나도 그런 적 많아. 몇년 전 지독한 독감에 걸린 적이 있다. 달달달달. 전기매트를 틀고 제일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는데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춥지? 온몸이 떨리니 관절 마디마디가 저려온다. 몸살인가? 집에 체온계가 있을 리가 없지. 주말이라 타이레놀을 먹고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축축해. 불쾌함에 깨어보니 새벽 3시. 이번에는 그대로 계속 잘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이불도 다 젖었네. 덜덜 떨리는 팔로 잠옷을 갈아입고 근처에 있던 무릎담요를 덮고 잠에 들었다. 아 살겠다고 약도 한번 더 먹었지. 내 몸은 내가 살린다.

다시 찾아온 추위에 뼛속까지 덜덜 떨려서 눈을 떠보니 월요일 아침 7시. 심상치 않아. 이러다 죽는 건가 싶지만 119나 응급실은 아직 좀 그래. 그리고 정신 차려. 너는 직장인이야. 할 일을 해야지.

오한에 벌벌 떨리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놀란 팀장님이 푹 쉬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물티슈로 얼굴만 대충 닦고 9시 오픈시간에 맞춰 집 앞 내과에 갔더니 체온은 무려 39도. 이런 체온이 진짜 나올 수가 있구나. 독감이었다. 시키는 대로 수액을 맞았지만 그때 뿐.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다음 날 새벽에는 자다가 코피까지. 가지가지한다. 어쩌지.


당시 부서는 매일 아침 직원들에게 그날의 물량이 분배되는 곳이었다. 처리기한은 당일까지. 마감을 못 지키면 부서성과가 깎였다. 그 말인 즉 내가 출근을 안 하면 누군가 내 일감을 대신 처리해야 한다는 뜻. 한참을 망설이다 하루 더 쉬겠다는 연락을 드렸다. 

“독감인데 할 수 없지.” 

팀장님이 괜찮다지만 내가 안 괜찮아. 민폐다 민폐. 나 때문에 덤탱이를 쓸 팀원들이 너무 신경이 쓰였다. 쉬는 게 쉬는 것 같지가 않아. 어떻게든 빨리 나가야 해.

독감 3일째 해열제를 먹고 출근했다. 열은 조금 내려서 38.5도. 아파서 잘 먹지도 못 했더니 일어서기만 해도 세상이 돌고 몸이 흐느적거린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이미 폐를 너무 많이 끼쳤잖아. 힘이 없어 바닥에 주저앉아 샤워를 하고 출근길에 처음으로 택시를 탔다. 뒷좌석에 쓰러져 누운 나를 보고 기사님이 걱정하셨다. 

“저기요. 손님. 회사가 아니라 응급실로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가야 해요.” 

쏟아지듯 택시에서 내려 어기적어기적 기어가다시피 엘리베이터 앞까지 왔다. 

“저기... 괜찮으세요?”

모르는 직원이 묻는다. 

네. 괜찮아요. 괜찮아야 해요. 근데 좀 이상하다. 갑자기 귀가 점점 먹먹해지더니 삐이이이 이상한 소리가 울린다. 응? 눈앞은 또 왜 이렇게 뿌옇지? 어어?


“꺄악!! 저기요!!!!” 

아득했던 소리가 점점 돌아온다. 흠칫. 눈을 떠보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 응? 등으로 올라오는 대리석 바닥의 한기. 익숙한 천장. 나 왜 여기 누워있지? 

“119 안 되요… 독감이에요. 괜찮아요.” 

안 괜찮으면서 괜찮다는 말은 왜 이렇게 잘도 하는지. 으으. 쪽팔려. 그 와중에 뒷감당이 걱정이네. 바닥이 울렁거려서 일어날 수가 없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내데스크에 있는 의자에 엎드려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팀장님이 내려오셨다. 

“야! 이렇게 아픈데 왜 나왔어!!” 

으악! 팀장님 그만! 이미 창피하단 말이예요!

결국 이번 주는 1주일 병가를 받기로 하고 사무실은 밟아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뒤를 돌아 회사를 빠져나왔다. 병원까지 데려다주겠다는 팀장님을 만류하고 들어간 가장 가까운 의원. 체온 39.1도. 체면도 버리고 대기실 소파에 드러누워는데 날 부르는 소리에도 일어날 수가 없다. 어지러워. 

“살려주세요.” 

쪽팔리게 눈물이 줄줄 났다. 결국 식겁한 원장님이 달려 나와 그 자리에서 수액을 잔뜩 때려 맞았지. 위대한 현대의학. 기력이 채워지자마자 택시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미련하지. 근데 어떡해. 내 일을 누가 대신 하고 있는데 배째라고 쉴 수는 없잖아. 복귀 후 아직 얼굴이 안 좋다고 걱정하는 동료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파서 죄송해요.


"언니가 좋아하는 참치김밥 사다 줄까? 자리에 갖다 줄게.”

하루종일 붙어있는 회사 사람들.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메신저 베프의 김밥 취향쯤이야 척하면 척이지. 괜찮다던 언니가 곧 한 줄만 부탁한다고 말을 바꾼다. 그래 잘 생각했어. 밥은 먹어야지. 얼른 가. 나는 알아서 할게. 건강관리실 침대는 항상 만석이다. 무슨 회사에 아픈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하긴 남 말할 처지가 아니야. 어느새 내 자리에도 온갖 약이 즐비하다. 진통제, 소화제, 위염약, 종합감기약, 안약 등등. 건강관리실에서도 상비약을 받을 수 있지만 멀기도 하고 아플 때마다 오며 가며 하나씩 산 게 이만큼이 됐다. 거기에 영양제까지 더해지니 서랍 한 칸이 다 약이다. 직장인으로서의 필수 덕목을 갖춘 셈이지. ‘골병’

사무실에서 나가기 전 어플로 포장주문을 한다. 언니의 참치김밥과 내 치즈김밥 각각 4500원. 허허. 라떼는 말이지. 김밥이 1줄에 단돈 천 원이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안에 들은 재료는 아주 가늘고 밥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학생일 때는 충분히 맛있었다. 하얀색 무늬가 그려진 초록색 분식집 접시. 거기 담기면 뭐든 더 맛있어 보인다고. 둘이서 김밥 한 줄에 떡볶이 1인분. 서비스로 나온 어묵국물까지. 그때는 그 정도로 충분히 행복했다. 그게 밥이 되냐고? 당연히 간식이지! 급식을 먹었어도 이 정도 채워줘야 학원을 갈 수 있다구! 그랬던 김밥이 김밥님이 되었다. 하긴 그게 다 언제적 이야기람.


삼삼오오 몰려나가는 사람들 틈에 껴서 편의점부터 들른다. 아픈 사람한테 김밥만 덜렁 주기가 좀 그렇잖아. 이리저리 둘러보다 그나마 건강식으로 보이는 요거트 음료 하나랑 컵과일을 골라 담았다. 거기에 나를 위한 바나나우유도 줍줍. 그래도 한참 남은 픽업시간. 함께하는 사람이 없으니 귀에 이어폰을 꽂고 느릿느릿 걷는다. 따사롭네. 직장인한테는 이게 산책이지. 주변에 새로 생긴 가게들도 구경하고 간만에 여유를 부린다. 즐기자.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광합성 시간. 특히 겨울이 다가올수록 햇님 구경이 어려워. 분식집에서 받아 든 김밥과 함께 느긋하게 회사로 돌아간다.

언니 부서 사무실에 들어가 주인 없는 자리를 기웃거리니 쉬고 있던 주변 직원들이 경계한다. 

“오과장님 자리 여기 맞죠?” 

내 말에 풀어지는 얼굴들. 다시 폰으로 눈을 돌린다. 이 귀한 시간에 방해해서 미안하네. 책상 위에 김밥과 챙겨 온 간식들을 남겨두고 재빠르게 그곳을 빠져나온다. 

“수고하세요.” 

이 불청객은 사라집니다. 총총총. 예전에는 자발적 혼밥족을 회사 부적응자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이 많아? 은행 다녀왔어? 약속 없어? 같이 갈래? 혼자 밥을 먹으려다 적발되면 질문 폭탄을 들어야 했지. 그런 그들의 오지랖이 귀찮았던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달력 가득 점약을 잡아놔야 안심이 됐었다. 그런데 코로나라는 빅뱅이 터졌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칸막이가 세워지자 혼자 가볍게 식사를 하고 자리에서 휴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혼밥붐이 오다니! 해보니까 좋거든. 아무리 편한 사이도 피곤할 때 만나면 지치는 법이니까. 그러나 곧 위드코로나가 시작되며 살짝 꺼지나 싶었던 유행이 짜잔! 갓생 열풍으로 다시 활짝 피어났다. 밥 먹는 시간도 아껴서 운동이나 공부를 하는 사람들. 대단하다. 나는 절대 못 해. 하긴 아무나 그렇게 못 사는 인생이니 GOD생이겠지. 그래도 덕분에 이래저래 혼밥이 편해져서 좋다. 부디 이 유행은 오래가면 좋겠네.


휴식공간에 자리를 잡는다. 아싸. 칸막이 자리! 이어폰을 빼고 우선 바나나우유를 한 모금 마신다. 캬아. 가끔 이 달콤함이 생각날 때가 있지. 한때 소화불량이 심했던 적이 있었다. 계속 체한 듯이 뭔가 답답하고 자려고 누우면 속이 쓰리고. 같은 부서 직원이 그럴 때 양배추즙이 좋다고 해서 하나 먹어봤다가. 으엑. 이거 쉰 거 아니야? 추천한 직원이 본인도 먹기는 싫은지 킁킁 냄새만 맡아보더니 정상이란다. 행주 냄새가 나긴하는데 먹다 보면 먹을만하다고. 점점 후각이 마비되는 거 아니고? 바로 포기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건 사람이 먹을게 아니야. 

의사 선생님은 무당처럼 나의 잘못된 식습관을 콕콕 잡아내더니 밥을 먹는 동안 휴대폰을 보지 말라는 충격적인 처방을 내려주셨다. 으아아아악 안돼. 그럼 평생 양배추즙 먹을래? 할 수 없이 갈 곳 잃은 눈을 멍하게 뜨고 한입한입 꼭꼭 냠냠 거북이 식사를 시작했다. 잉? 왜 음식이 더 맛있지?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속이 너무 편했다. 그냥 좀 잘 씹은 것뿐인데 신통하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식사법을 지키고 있다. 폰 없이 냠냠꼭꼭.

폰이 앞에 있으면 보고 싶으니까 멀찍이 치워두고 돌돌 말린 종이포장을 푸른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김밥이 있다. 충무김밥이나 삼각김밥 같이 모양부터가 다른 녀석들이 있고. 김으로 덮인 겉모습은 똑같지만 자른 속은 제각각인 다양한 재료들. 당근, 시금치, 단무지, 계란, 햄이 들어간 기본 김밥에 참치, 치즈 같은 클래식부터 새우튀김이나 돈가스 같은 화려한 라인업. 요새는 거기에 크림치즈, 제육, 삼겹살, 샐러드까지 안 어울리는 재료가 없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밥은 기본구성에 슬라이스 치즈가 더 들어가는 치즈김밥. 새로운 메뉴들의 유혹에 잠시 혹해서 넘어가더라도 언제나 클래식이 최고다.

젓가락으로 재료가 터지지 않게 조심조심 김밥을 하나 집어든다. 와아. 예쁘다. 색색의 재료들이 아기자기하다. 정말 김밥은 완전식품이야. 신선한 채소에 탄단지라 불리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이 다 들어있고 간편하게 뚝딱 먹을 수 있는데 심지어 저렴해. 쓰레기도 별로 안 나오고. 거기에 어디서 먹어도 보증된 맛. 완벽하지! 하지만 내가 만들 생각은 절대 들지 않는다. 요즘은 밥이 적고 재료가 많이 들어간 김밥이 유행이다. 아예 밥 없이 채 썬 계란이 듬뿍 들어가는 키토김밥도 있지. 밥이 없는데 어떻게 안 터지지? 먹을 때마다 그 기술이 참 신기하다.

냐암. 한입에 어떻게 들어가나 싶지만 또 막상 넣으면 쏙 잘 들어가는 커다란 김밥. 우물우물. 간간한 밥에 이런저런 재료들이 스쳐 지나간다. 오독오독한 당근에 간간히 느껴지는 짭조름한 치즈, 아삭하고 시원한 단무지, 포슬한 계란, 시금치, 꼬수운 참기름과 김. 다 다른 재료들이 씹으면 씹을수록 조화로워진다. 맛있어. 포장이라 국물이 없는 게 아쉽지만 목이 막힐 때 한입씩 마셔주는 바나나우유가 또 기가 막힌다. 어렸을 때 소풍 가면 이렇게 먹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어렸을 때 원픽이었던 초코송이도 사 올걸 그랬나.


하나씩 찬찬히 즐기다 보니 꽁다리 두 개만 남았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재료들. 이건 진짜 한입에 안 들어갈걸? 어쩔 수 없다는 듯 얌생이처럼 도톰한 계란말이를 하나 쏙 빼먹는다. 맛있다. 햄도 하나 쏘옥. 히히. 눈치 볼 사람이 없으니까 이런 게 좋네. 맞아. 소풍 아침에 엄마 옆에서 하나씩 주워 먹는 김밥재료가 진짜 맛있었지. 햄은 절대 안 주셨지만 말이야. 크크. 바보같이 혼자 실실 웃으며 점심식사를 마무리한다. 

의사 선생님. 저 이제 다 먹었으니까 폰 봐도 되죠? 헤헤. 남은 시간은 늘어져서 유튜브 영상이나 봐야지. 갓생은 못 살지만 그래도 이 여유로운 시간이 너무 좋다. 난 헐랭하게 살래. 점심시간이 끝나고 동기언니한테 연락이 왔다. 한숨 자고 나니 살만하단다. 다행이네! 그러면서 이것저것 챙겨줘서 고맙다고 나중에 한턱 쏜다는 언니. 아니야. 나도 덕분에 잘 쉬었어. 동기 좋다는 게 뭐야. 그리고 언니도 전에 나 샌드위치 사줬잖아. 크크. 오늘 무리하지 말고 얼른 칼퇴하고 병원가. 그래야 내일 또 나랑 같이 메신저로 수다 떨지. 응응.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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