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원한 을이다
직장인에게 찾아오는 유난히 버거운 하루. 신입 때는 매일이 그랬다. 듣자마자 속이 뒤틀리는 알람. 출근길마다 회사 로비에서 사원증을 차며 간절히 빌었다. 제발. 제발 오늘이 무사히 지나가게 해 주세요. 아직 한 사람 몫의 업무를 다 받지도 못했는데. 왜이리 먼지 같은 일에 허둥거리는지.
그런 나와 달리 부서의 온갖 복잡한 일에 내 뒤치다꺼리까지 떠맡은 사수는 항상 평온해 보였다. 주변 선배들도 마찬가지. 태풍처럼 몰아치는 일에도 진상민원이나 상사의 헛소리에도 그들은 묵묵히 모니터 앞을 지켰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내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데. 오고가는 선배들의 농담 속 어색한 미소를 짓는 내 속은 온통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웃음이 나오지? 가장 하찮은 일을 하는 나만 힘들어 보였다. 내가 힘들 자격이 있을까? 자려고 누우면 찾아오는 자괴감. 자야 하는데. 지금 안 자면 내일 또 사고를 치고 다닐텐데.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나도 노력하면 언젠가 저렇게 모든 일에 덤덤해지리라. 그 믿음으로 매일 아침 내 자리로 되돌아갔다. 아무리 서러워도 울지 않았다. 정신 차려. 니가 애야? 눈물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아. 스스로를 매섭게 다그치고 또 다그쳤다. 그럴 시간에 빨리 하나라도 더 배우라고! 내일의 안녕을 바라며 이를 악 물고 모니터를 바라봤다.
오늘을 견디다 한달이 가고. 계절에 따라 옷을 몇번 바꿔입다보니 몇년이 흐르고. 그러다 그때의 사수와 비슷한 연차가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괜찮은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다.
매일매일이 고난이다. 간신히 산 하나를 넘으면 어디 이것도 넘어보라는 듯 더 높은 산이 나타나고 어제는 상사 때문에 울화통이 터지고 오늘은 후배 때문에 깨진 뒤통수에서 배신감에 차오른 피가 철철 흐른다.
물론 나도 그런 일들에 참지 않던 시절이 있었지.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상사의 억지에 바락바락 대들고 부당함이 느껴지면 선배고 뭐고 쫓아가서 따져대고. 후배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내 상식에 벗어나는 이들에게 가차 없이 쓴소리를 뱉어댔다.
저기요! 이어폰 끼고 일하다 욕을 드시든가 마시든가 내 알 바 아닌데 본인 전화는 잘 받아야 할 거 아니에요! 장난해요?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한다고? 해봐! 난 업무태만으로 감사부에 신고할 거야! 지엄한 회사의 회초리 질에 당해본 적이 없으니 참을 이유도 없던 무대뽀 시절. 자기 일도 아니면서 총대를 메고 선발대로 튀어나갔다. 도저히 다들 참을 수가 없어!
불처럼 타오르던 나도 30대가 되자 화가 줄었다. 아니 포기했다. 아무리 화를 내도 떨어진 일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투는 시간만큼 야근만 늘어난다. 아무리 타당한 논리로도 무논리를 이길 수는 없다. 처음부터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상대와는 대화를 빨리 끝내는 게 최선이다. 부모도 안 가르친 개념을 내가 알려줄 수는 없다. 말 한마디에 바뀔 후배는 애초에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바른 말을 해봐야 내 일만 늘어난다. 그 모든 곳에 쓸 시간과 에너지로 키보드를 두드려야 1초라도 빨리 집에 간다.
화를 낼 기운조차 없다. 분노도 열정의 한 형태였는지 그 정도로 잘하고 싶은 일도 없다. 호봉만큼 쌓여버린 체념. 기대를 내려놓고 열정도 내려놓고 그러다 나도 내려놓고 다 내려놨는데 이 사원증은 왜 갈수록 무거워질까. 사무실에서 말수가 점점 줄어든다. 반짝이는 사원증을 목에 건 후배가 내가 대단하단다. 어떻게 그렇게 모든 걸 척척해내냐는 그 말에 헛웃음이 튀어나가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그래 보여? 다행이네. 사무실 의자에 슬어버린 오래 묵은 곰팡이처럼 쓴 맛 가득한 미소와 함께 모니터만 바라본다. 예전 그 선배들이 그랬듯이.
하지만 이런 나의 평정심이 시험받는 날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출근하자마자 걸려온 이사님의 호출. 왜부장님, 팀장님, 과장인 나까지 지금 모두 올라오란다. 헐레벌떡 임원실로 달려 나가는데 회사생활로 쌓인 빅데이터가 경고알람을 보낸다. 뭔가 이상해. 그래도 별 수 있나. 부르면 가야지.
6개월을 끌어온 프로젝트가 날아갔다. 후우. 머리에 스팀이 훅 오른다. 이 일 때문에 야근에 주말에 주 52시간 근무시간 따위 지켜본 적이 없는데. 위에서야 타이틀만 툭 던지면 그만이지. 논리를 만들고 살을 붙이는 건 온전히 내 몫. 데이터를 이렇게도 내보고 저렇게도 내보고 삽질에 삽질. 보고할 때마다 이리저리 휘둘리던 보고서는 최종, 진짜 최종, 찐찐최종… 몇 번째 버전인지 기억도 안 나. 하지만 다 소용없다. 그 모든 시간은 보고 10분 만에 모래처럼 흩어지고 내 파일들은 쓰레기더미가 되어버렸다.
진심으로 그러한 것인지 연기인지 그 속까지 알 수 없지만 본인 또한 이 상황이 난처하다는 이사님이 차 한모금을 삼켜가며 이야기를 이어가신다.
“내가 생색내는 것 같아 그동안 말을 안 했는데 내가 눈치껏 몇번 운을 띄워봤는데. 아 위에서 꿈쩍도 안 하시는 걸 나라고 뭐 어쩌겠어. 허허. 암튼 다들 고생많았고.”
하! 수첩을 보는 척 포커페이스에 실패한 얼굴을 숙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소리가 목 끝까지 차오르지만 굳게 입을 다물며 말을 잠근다. 너도 알잖아. 어차피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없어. 이 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 나에게는 하늘 같은 상사들이지만 조직의 지엄한 위계질서 속에서 이들도 결국 누군가의 부하직원에 불과하다. 6급 주임부터 1급 실장을 지나 임원으로 이어지는 직급의 사다리에서 한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 없는 4급 과장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
알아.
안다고.
무력감이 몸을 짓누른다.
대부분의 공공기관은 지자체나 정부부처 산하기관으로 운영된다. 특정 정부부처에 속해있는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 담당부처가 있긴 하지만 채용, 예산, 사옥관리 등등 사안에 따라 기획재정부,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등등 담당부처가 이리저리 엮여있다. 우리 회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뜻. 해당 부처의 승인을 받아야 뭐든 돌아가는데 그 승인을 받는 게 실무자의 노력만으로 될 리가 없잖아.
이번에 내가 검토한 업무는 무려 두 부처의 승인이 필요한 내용이었다. 한 곳을 설득하는 것도 어려운데 만만치 않은 과정이지. 담당 부처들을 설득하려고 몇달동안 세종시를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왜 게임하다보면 일정 레벨을 갖추지 못하면 입장도 못하는 던전들 있잖아. 협상이라는 게 딱 그래. 서로 급이 안 맞으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만나주지 않거든.
던전 입장. 나에게는 절대적인 갑 중의 갑이지만 정부부처에서는 흔한 몹에 불과한 담당 사무관님과 협의 완료. 다음으로 중간 보스몹인 그쪽 과장님을 뵈려니까 부장님만으로는 좀 그렇대. 그래서 실장님을 모시고 갔지. 클리어! 이제는 4대 천왕 국장님을 만날 차례. 이사님까지 파티원으로 합류해주신 덕분에 무사히 미팅 성공. 그런데 우리 이사님의 보고가 끝나자마자 국장님이 난색을 표한다. 자기들이 아무리 설명해봐야 최종 보스몹인 차관님을 절대 꺾을 수 없을거라고. 서로 시간낭비하지말고 위부터 설득해라 이거지. 거절을 위한 핑계일 수도 있고. 하아. 어쨌든 이를 어쩌지. 마지막 던전열쇠를 얻으려면 우리 전하가 나서줘야 하는데.
탁 트인 뷰가 한 눈에 바라보이는 사옥 꼭대기. 남부럽지 않게 크고 호화로운 기관장실. 그곳의 푹신한 가죽의자에 앉아 머리를 조아리는 우리를 차갑게 바라보는 사람. 이 상황에 대한 보고를 다 듣고나서도 뚱하니 아무런 액션이 없다. 사태파악을 못 하는건지 안 하는건지.
그랬던 그 윗분께서 그냥 이대로 접어버리자는 판단을 한 것이다. 아니지. 데드라인이 지나도록 의사표명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그냥 뭉게버린거야. 난 정규직이지만 임원들은 계약직이거든. 몇년 있다 떠날 회사를 위해 자기 체면까지 구겨가며 아쉬운 소리 하기 싫다 이거지. 이럴 거면 처음부터 시키지를 말던가. 너때문에 나만 이게 무슨 개고생이냐고.
하긴 그쪽이야 나란 직원이 있는지도 모를거야. 내게는 하나뿐인 소중한 직장. 하지만 그에게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정거장일 뿐이니까. 우리 둘의 온도가 다른 건 당연한건가. 주인 없는 회사에 주인의식을 바라다니 나도 참. 아직도 덜 내려놨네.
“고생했어.”
임원실을 나오자마자 부장님의 힘없는 위로가 들린다. 답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에 온통 부정적인 말만 잔뜩 떠오른다. 왜 이래. 애도 아니고. 이성이 달려 나와 감정을 뜯어말린다. 그래.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어보니 나만큼이나 지쳐버린 상사들이 보인다. 버석하게 말라붙은 얼굴에 깊게 새겨진 주름.
“두 분도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겨우 끄집어낸 나의 대답에 흐릿한 미소로 끄덕이는 둘. 다 던지고 집에 가고 싶다. 하지만 오늘도 컴퓨터에는 당장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태산같이 버티고 있어. 가자.
사무실에 돌아와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니 거기 비친 내 표정이 살벌하다. 어쩐지 보고 잘 다녀오셨냐는 인사를 아무도 안 건네더라. 마지막 정신줄을 붙잡듯 마우스를 꼭 쥐고 업무 파일을 클릭한다. 후우. 일에 몰두하는 척 커다란 모니터를 노려보며 험한 얼굴을 가린다. 집중하자 집주웅. 하지만 나도 모르게 스멀스멀 새어나가는 빡침. 주변에서 힐끔거리며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진다. 에효. 하는 수 없지. 탕비실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예전에 기분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태도가 바뀌던 상사가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갑자기 키보드를 쾅쾅 내리치고 여기저기 시비를 걸어대던 코뿔소. ‘내 기분이 나쁘면 너도 그래야지! 부하직원이 어딜 감히!’ 라는 듯한 그 모습에 나를 포함한 팀원들은 매일 시들어갔다. 혹시 내가 지금 그래보이나? 벌컥벌컥. 찬물 한잔을 들이켜자 후우. 참았던 한숨이 터져 나온다. 좋은 사람까지는 못 되도 그런 인간은 절대 되고 싶지 않아. 후우우.
아직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점심시간이라니. 하나 둘 일어나는 사람들. 열기가 남은 귀에서는 아직도 심장소리가 울린다. 빈 속인데 배도 안 고프고 입이 쓰다. 그냥 이대로 어디 가서 누워있고 싶네. 전에는 이럴 때 탕비실에서 대충 아무거나 주워 먹거나 그냥 굶고 누워있었는데. 그로 인한 업보로 두 번의 병가를 받았다. 수술실에 누워서야 정신을 차린 헛똑똑이. 밥은 먹어야지.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오전에 못한 일까지 처리하고 칼퇴를 하려면 몸에 탄수화물을 넣어줘야해. 30대는 그런 나이라구.
그래도 다행히 떠오르는 메뉴는 있다. 빡치는 날 항상 땡기는 그것. 햄버거! 약속 없으면 같이 먹자는 부서사람들을 괜찮다고 만류하고 혼자 먹기로 했다. 미안. 근데 지금은 다른 사람과 함께할 여유가 없어. 남들 시선이 신경 쓰이던 시기는 지났다. 이렇게 속이 복잡한 날에는 혼밥이 편해. 혹여나 누가 왜 혼자냐고 물어도 ‘처리할 게 있어서’ 한마디면 끝. 다들 한 번쯤은 점심시간에 관공서나 병원에 간 경험은 있을 테니까.
남들은 깔끔하게 잘만 먹던데 내가 먹으면 왜 그러는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햄버거를 먹고 나면 소스와 재료가 줄줄 흐른다. 그래서 밖에서는 포크와 나이프가 나오는 수제버거를 먹거나 어울리지 않게 귀족아가씨 흉내를 내곤 한다. 뇸뇸. 새처럼 작게 한입 쪼아 먹고 입 한번 닦기. 아유 답답스러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두 손에 들고 와구와구 먹을 수 있는 그 햄버거가 필요해.
비장한 표정으로 이 동네에 하나 뿐인 프랜차이즈 햄버거가게에 들어선다. 고래가 잠시 올라와 숨을 고르듯 직장인의 점심시간은 단순한 밥이 아니다. 지금 어떻게든 스트레스를 좀 덜어내야 오후의 역경을 삼켜낼 수 있어. 1분 1초가 아까운 시간 대충 빨리 나올 것 같은 햄버거세트를 주문하고 등받이도 없는 딱딱한 의자에 걸터앉는다. 하아. 좋다. 오늘따라 이 의자가 왜 이리 편할까.
우우웅. 진동벨이 울린다.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 쟁반을 받아 들고 계단을 오르는데 막 튀겨낸 튀김냄새가 코를 찌른다. 히유. 이 황홀한 녀석. 결국 앉자마자 감자튀김부터 하나 꺼내 물었다.
바삭!
오! 눅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잖아! 역시 튀김은 위대하다. 절대 풀릴 것 같지 않던 분노가 고작 이 가느다란 감자 하나에 녹아내린다. 입에 퍼지는 짭짤하고 고소한 맛. 스트레스에 절여진 손이 절로 그쪽을 향한다. 아 케첩! 감자튀김 상자 한켠을 북 찢어서 케첩을 짠다. 이러는 이유는 몰라. 그냥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해주던 방식이야. 세팅완료.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먹어볼까? 드디어 메인인 햄버거를 드는데... 잉?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쩐지 너무 일찍 부르더라. 피크시간이라 미리 만들어둔 녀석이군. 뭐 한창 바쁠 시간이니 할 수 없지. 잘 싸인 종이 포장을 풀어서 햄버거가 반쯤 나오도록 벗겨낸다. 딱 봐도 오래 익혀서 육즙이 다 날아가버린 뻣뻣하게 식은 패티. 얇디얇은 토마토. 구색만 맞춰 넣은 양상추 조각들. 패티 열기에 녹은 흔적조차 없는 쌩쌩한 치즈. 괜찮아. 이런 줄 알고 왔어. 양손으로 단단히 잡아들고 와아앙! 냅다 크게 물었다. 그래! 이 맛이지! 눈이 번쩍인다.
예상가능한 뻔한 맛이다. 그래도 지금 필요했던 바로 그 맛이야! 고급 수제버거 따위 부럽지 않아! 입 안 가득 햄버거를 채우고 우물거리니 두통이 가신다. 꾸울꺽. 커다란 첫 입에 꾹꾹 눌러왔던 설움을 삼키고. 바로 이어지는 두 입에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누군가에 대한 원망을. 세 입에 그 순간 아무말도 못한 나애 대한 미움을 삼킨다.
목이 메어온다. 후후. 이 순간을 위해 일부러 참고 있었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갈증이 느껴지는 순간. 쪼오오오옵. 달달한 콜라를 시원하게 한입 가득 머금는다. 또다시 꿀꺽. 캬아! 아까부터 목 끝에 걸려있던 무언가가 씻겨 넘어간다. 먹고 먹고 마시고 먹고마시고 무한반복. 순식간에 햄버거 한 개가 사라져 간다.
“하아. 이제 좀 살겠네.”
만족감에 절로 튀어나온 말. 스트레스 폭격에 쓰러졌던 평정심이 정신을 차린다. 그래. 사실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 호봉이 괜히 오르는 게 아닌가봐.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딱 촉이 오더라고. 아마 상사들은 나보다 더 먼저 알아차렸겠지. 짬이 있잖아. 그런데 나서야 할 윗 분께서는 실무부서만 타박하시니 방법이 있나. 불 보듯 뻔한 결과를 애써 외면하며 우리는 저번주까지도 바늘구멍을 찾아 이곳저곳 출장을 다녔다. 근데 그러면서 확신만 점점 커지더라고. 이 순간이 내 입사 이래 최고의 삽질이 될 거라는 확신.
예전 상사 같았으면 보고가 끝나자마자 나 때문이라고 몰아댔겠지. 어쩌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거냐. 네가 대체 한 게 뭐냐. 나도 다 들어본 헛소리들. 본인들이 내린 결정은 다 까먹고 실무자 탓하는 상사들이 널리고 널렸어. 그래. 그들에 비하면 지금 상사들은 아주 상식적이다. 임원실을 나오자마자 나부터 챙겼잖아. 자기들도 많이 실망했을 텐데 말이야. 고맙지. 맞아.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곳이잖아. 감사해야할 일이지.
이번 일을 진행하면서 이들과의 관계가 좋기만 했던 건 아니다. 의견다툼으로 투닥거리기도 하고 섭섭했던 적도 많았어. 그러다 또 쿵짝이 잘 맞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를 칭찬하고 응원했지. 회의테이블에 모여앉아 야근으로 지새운 밤. 회사 일이 으레 다 그렇잖아. 어떻게든 잘해보자고 지지고 볶았던 거지. 그렇다. 내 시간만 날아간 게 아니야.
이상하지. 회사를 다니면 다닐수록 상사들 입장이 자꾸 이해가 된다니까. 나 또한 승진을 하면서 팀장과 직원들 사이에 끼여보니 같은 ‘끼인 자’ 로서의 고충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상황 처음도 아니고. 아직 남아있던 원망인지 미움인지 모를 감정을 콜라로 씻어 넘긴다. 같이 야식먹다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큰일이네. 원래 정 중에 미운 정이 제일 무서운데.
아주 합리화의 달인이다. 가끔은 매번 이런 식으로 적당히 넘어가는 내가 비굴해진 것 같아 서글프기도 하지만 별 수 있나. 덕분에 먹고 산 걸. 이 또한 나도 모르게 다져진 직장생활 스킬일 거라고 생각해주자.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사표를 낼 수도 없잖아. 세상살이에 노련해진 걸로 해줘. 나라도 날 좀 좋게 봐줘야지. 열심히 애쓰면서 사는 게 기특하잖아.
회사 로비에서 팀장님을 마주쳤다.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조금 밝아진 내 목소리에 상사의 얼굴도 밝아진다. 나의 식사여부를 되묻는 팀장님. 햄버거를 먹었다는 내 대답에 의아해하신다. ‘모르세요? 빡쳤을 때는 햄버거만 한 게 없어요.' 좀 괜찮아졌다는 의미로 건네는 농담. 그 뜻을 알아들으신 건지 아니면 평소 나답지 않은 말투가 재밌으신 건지 팀장님이 빵 터지신다. '씩씩해보여서 다행이네.’ 흥. 그래요. 오늘은 그런 걸로 칩시다. 다들 미워 죽겠는데 미워할 수 없는 식은 햄버거 같은 날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