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조직문화 캠페인
"지우야! 너 이거 봤... 아니 보셨. 아니아니. 푸큽. 김주임님. 공지사항 보셨어요? 흐키키킥”
크크크크. 하루종일 말을 버벅거리는 나를 보며 주변 후배들의 웃음이 터진다. 떼끼! 웃지 마!... 세요오! 흐흐흐흐. 아이고 웃겨라. 나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네. 갑자기 안 쓰던 존댓말을 쓰려니까 자꾸 말이 엉키잖아. 크키키킥. 직원들이 낄낄거리는 소리에 파티션에 갇혀있던 팀장님이 소라게처럼 쏙 튀어나온다.
"뭐야. 뭐가 그렇게 재밌어? 아 맞다. 뭐가 그리 재밌으세요? 크큭.”
"팀장님! 모범을 보이셔야죠! 앞으로 주의해 주세요. 또 그러시면 부장님한테 이를 거예요!”
일부러 근엄한 목소리로 과장되게 엄포를 놓는다. 물론 농담. 입꼬리도 어이가 없다는 듯 연신 씰룩거린다. 히히. 그렇게 우리는 오늘 내내 참느라 애써왔던 웃음을 토해내듯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아우. 속 시원해. 이 지시에는 또 얼마나 장단을 맞춰줘야하는 걸까. 깝깝시럽다 진짜.
오늘부터 회사에 반말금지령이 떨어졌거든. 외부강사까지 모셔와서 교육도 들었어.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사무실에서 함부로 반말을 쓰면 안 된대. 친하다는 느낌도 일방적인 감정일 수 있다는 강사의 말이 왠지 가슴에 켕긴다.
"먼저 ㄸ...뜨세요. 주임님”
푸흐흐흡. 팀장님의 말실수에 또 한 번 터진 웃음지뢰. 팀장님이 머쓱한 표정으로 작은 항아리에 담긴 동치미를 뜬다. 하필 존댓말 챌린지 첫날에 팀점심이라니. 메뉴는 철판주꾸미. 회사 기조에 맞춰 민주적인 조직문화에 이바지하고자 사다리 타기로 뽑았다. 키키.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들려오는 지글지글 소리와 매콤한 향기에 위장이 격렬하게 요동친다. 내 쭈꾸미 내놔!! 볶음밥도!
철판 때문에 후덥지근했는데 살얼음이 동동 떠있는 시원한 동치미 한입에 속 안 가득 냉기가 차오른다. 시큼 달달하니 침샘 폭발. 하지만 그 맛을 즐길 수가 없구나. 장난치는 것도 잠깐이지. 원래 반말을 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존댓말을 쓰려니 말 자체가 조심스러워졌다. 다시 나와 후배들 사이에 장벽이 쳐진 느낌. 그 벽을 허무는데 제법 많은 공을 들였는데.
평소 같으면 재잘재잘 말들이 많았을 팀원들도 조용히 끓어오르는 쭈꾸미만 바라보고 있다. 막내는 원래 존댓말만 했을 텐데 왜 조용한 거지? 그래. 후배들은 불편했을지도 모르잖아. 눈치없던 선배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요새 너무 편하게 대한 것 같기도 하고. 애들이 워낙 착해서 티를 못 냈겠지. 생각이 생각으로 이어져서 멍하니 앞에 놓인 동치미만 퍼먹는다.
내가 입사한 이후로 우리 회사에서는 다양한 조직문화 개선활동을 펼쳐왔다. 그 카테고리도 무척 다양하지. 우선, 지금 이 난리를 불러온 일하고 싶은 회사 만들기가 있다. 직원을 상대로 여는 익명 설문조사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모인 젊은 직원들의 한풀이에서 시작되는 게 대부분. 아이디어 좀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정작 의견을 내잖아? 그러면 참석하신 윗분들 표정이 겁나 싸해져. 누가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뒤에서 난리도 아니지.
요새 한창 난리인 ESG나 지역상생처럼 회사의 경영방침을 조직문화에 녹여내려는 시도도 많이 한다. 왜냐면 이게 다 공공기관 경영평가 보고서에 들어가거든. 이것 좀 보세요! 저희요. 직원들이 모두 함께 전사적으로 참여했답니다! 그 증거사진들이 보고서에 한줄한줄 새겨지는 활동내역이거든. 저희는 정부방침에 열심히 따르는 성실기관이랍니다! 딸랑딸랑!
같은 그룹에 들어있는 타 공공기관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따내야 하는 경영평가 등급. 우수등급을 받아야 직원들 성과급이 잘 나와서 사내 분위기도 좋아지고 기관운영도 여러모로 편해지니 회사에서는 좋든싫든 조직문화에 사활을 걸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적절한 테마가 뽑히면 본격적인 캠페인 활동이 시작된다. 담당부서의 고뇌가 느껴지면서 동시에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묘하게 억지스러운 구호문구부터 만들어야지. 요즘은 아예 이벤트 삼아 사내공모전을 열기도 한다. 다들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신박한 문구들이 나온다니까? 하지만 공모전에서 뽑히면 알지? 당선자의 재능을 높게 평가한 윗분때문에 까딱하다 일이 늘어나는 수가 있어.
(선후배 상관없이) 나 먼저 인사하기. (연차 사유나 개인 사생활) 안물안궁. (워크숍이나 출장은 당일로 끝내고) 잠은 집에서 자자. 그리고 전설의 캐치프레이즈인 회식도 119. 술은 1종류로 1차까지 즐기고 9시에 끝. 이거 봐바. 몇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안 까먹었잖아. 오늘 날짜도 긴가민가하고 내 나이도 헷갈리는데 이 문구들은 잊혀지지 않는다니까.
회사 돌아가는데 관심 없는 직원조차 툭 치면 그 구호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올 때까지 충분히 세뇌시켜야 한다. 그걸 위해 일단 회사 사옥을 전부 캠페인 문구로 도배해버리지. 사내방송, 포스터, 바탕화면은 당연하고 심지어는 마우스패드나 메모지 같은 굿즈까지. 챌린지로 대회도 연다. 마치 네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냐는 회사의 광기가 느껴지지.
그리고 입담좋은 외부강사를 초청해서 집합교육도 열어. 마무리는 문구 떼창.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의 냉담한 반응과 저조한 참여율 탓에 조직문화 담당자는 언제나 고통받고 있지만 말이야. 허허.
뭐 조직문화 개선이 항상 나쁜 건 아니야. 덕분에 2차도 없어지고 노래방 탬버린 부대에 억지로 안 끌려가고. 거기에 워크숍은 또 어떻고. 이제 당일 워크숍이 대세라니 너무 좋잖아. 1박 2일 워크숍이 디폴트였던 시절. 졸려죽겠는데 저녁식사가 끝나도 쉴 수가 없었다. 말로는 해산을 외치지만 상사방에서는 밤새 술자리가 이어졌거든. 가서 술 한잔 따라드리고 인사만 하고 와. 그 말에 속아서 들어가면 절대 못 빠져나오는 개미지옥. 신발장 앞에는 지옥문을 지킨다는 케르베로스처럼 매의 눈으로 탈옥하는 죄수들을 검거하던 이상한 선배들이 꼭 있었어. 아니. 그렇게 좋아하시는 술 자기들끼리 실컷 마시라고.
“너네는 그만 가서 쉬어.”
술 심부름을 핑계로 팀장님이 꺼내준 덕분에 밤 10시가 넘어 방으로 돌아온 우리. 아까까지는 멀쩡하더니 갑자기 술에 취해 비틀대던 후배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화장실로 기어간다.
“아이고 어떡해. 괜찮아? 등 두드려줄까?”
짜증이 나기 이전에 가여웠다. 신입이라고 점심 때부터 선배들한테 시달렸거든. 긴장이 풀리니까 취기가 올라왔나봐. 정신도 못 차리면서 죄송해요를 중얼대는 후배. 그래. 무리한다 싶더라. 이제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막내를 문턱에 눕혀두고 물에 적신 수건으로 여기저기 뭍은 지지를 닦아줬다.
“괜찮아. 다 이런 실수해. 나는 신입 때 부모님이 회식장소까지 데리러 왔잖아.”
“크키킥.”
이 와중에 웃기는.
이불을 펴고 막내님을 겨우 눕혔는데 누가 우리방 초인종을 미친듯이 누르기 시작했다. 과장님인가? 승진을 앞두고 상사들에게 눈도장을 찍어야했을 과장님은 팀장님과 함께 적진에 남았다.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저라도 있을까요?”
내 우려에 까불지 말고 가라고 등을 떠밀으셨지. 그런데 반갑게 문을 열고 마주한 건 불청객 옆팀 팀장.
“나와. 좀 있으면 이사님 오신대. 젊은 여직원들이 분위기도 좀 맞추고 그래야지? 내가 이런 것까지 챙겨야 돼?”
“네?”
젊은 여직원? 나도 그때는 한 성격 했거든. 잠도 덜 깼겠다 리액션이 좋게 나갈리가 있나. 그랬더니 팀장이 화를 버럭낸다.
“야 나만 뺑이치냐? 우리 팀은 다 저기 앉아있어. 너 니네 팀장 믿고 깝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내가 우스워? 여기가 대학교 엠티장인 줄 알아? 너 지금 여기 일하러 온거야. 됐고. 싫으면 니네 팀 막내 보내. 알았어?"
쾅!
꼰대 아저씨라고? 무슨 소리야. 본인도 여자야. 그러니 더 꼴뵈기 싫지. 어휴. 본인이 남자상사한테 잘 보이려고 여자 후배 팔아먹는거지. 물귀신도 아니고 진짜. 차라리 물귀신이면 꺼지라고 발로 찰 수라도 있을까.
당장 다음달부터 출산휴가인 만삭 대리님이 워크숍에 불참한다고 했을 때도 쥐잡듯이 잡더니. 좀 있으면 육아휴직가서 실컷 놀텐데 이거 하나 못 참냐. 나때는 육아휴직이고 뭐고 백일짜리 젖먹이 애기를 두고 나왔네. 마지막 날까지 일하다가 퇴근길에 양수가 터졌네. 맨날 똑같은 요즘 애들이 배가 불렀다 메들리 알잖아.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물귀신 팀장이랑 죽이 척척 잘 맞던 부장도 마찬가지였다. 대리님 저번에 유산한 거 뻔히 알면서 얼마나 구박을 하던지. 회의 매니아라서 무슨 일만 생기면 사람들을 회의 테이블로 소집하던 부장. 한번 붙잡히면 3시간은 기본이야. 의미없는 마라톤 회의 때문에 매일 같이 이어지던 야근까지. 어느 날은 회의 내내 대리님 표정이 너무 안 좋은거야. 역시나 회의가 끝난 후에 사색이 되서 지금 급하게 병원에 가야겠다던 대리님.
“하! 부장님한테 니가 가서 직접 말해.”
울먹이던 눈으로 짐도 못 싸고 떠나는 등에 대고 혀를 차던 팀장과 요즘은 임산부가 상전이라며 맞장구를 치던 부장. 그 말에 같은 팀도 아닌 내 혈압이 치솟았다. 다음날 다행히 애기는 괜찮지만 다음주 예정된 서울 출장은 어려울 것 같다는 대리님의 보고에 부장은 걱정 한마디 없이 임신 중기면 안정기 아니냐고 직원들 앞에서 대놓고 꼽을 주었다. 팀장이랑 둘이 다녀오면 되잖아. 팀장은 담당자 아니냐고. 그 밖에도 대리님이 어쩌다 커피라도 한모금 마시면 그것도 못 참으면서 엄마라고 할 수 있냐. 과자 먹으면 아토피 생기는 거 모르냐. 쯧쯧. 사탄도 저 정도는 아닐텐데.
오죽하면 우리가 태교 브레이커라는 별명도 만들었어. 본인도 애가 둘이나 있고 심지어 딸도 있으면서 자기 아내가 임신했을 때도 저랬을까. 아! 하긴 맨날 입버릇처럼 말했지. 본인 딸은 열심히 키워서 이런 대접 안 받게만들거라고. 그러던 딸이 대학생이 되고 인턴을 하는데 6시 넘어서까지 야근을 한다고 얼마나 안타까워하던지. 그 말에 참지 못한 내가 저희도 어제 10시까지 야근했다고 한마디를 하니까 가만히 노려보더라. 개진상이야.
공공기관이다보니 임신하면 2시간 단축근무가 가능한 우리 회사. 그런데 난 대리님이 제 시간에 가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임신하면 야근수당도 못 받는데 얼른 가시라고 주변에서 백번 말해도 헤헤 웃기만 하셨지. 시간만 단축시키면 뭐 해. 일은 그대로인데. 게다가 출산휴가 들어가면 당분간 자기 자리가 공석이 될테니까 그 전까지 해줄 수 있는 일은 다 해놓고 싶단다. 더 이상 민폐끼치기 싫다고. 임신이 폐가 되는 세상. 사기업은 오죽 할까. 그러면서 자기 애기는 태교를 엑셀로 해서 똑똑할 것 같다고 농담도 하셨다. 나중에 건강하게 태어나준 아이에게 부모도 아닌 내가 어찌나 고맙던지.
이런 상사들 밑에서 버티던 시간동안 나는 마음 속에 늘 기도문 같은 문장을 곱씹고 살았다. 존경받는 선배는 못 되도 부디 저런 선배는 되지 말아야지. 제발. 동기랑 같이 약속도 했다니까. 만약 우리 중 하나가 저런 개진상이 되면 정신차리라고 뺨이라도 때려주는거야. 알았지? 약속!
폰을 켜보니 물귀신팀장한테 온 부재중 통화가 엄청 찍혀있었다. 우리 팀장님이랑 과장님한테 SOS 전화를 해봤는데 안 받으시네. 하아. 이를 어쩐다. 고민하고 고민하다 일단 가보기로 했다. 보나마나 꽐라가 되어계실 과장님도 모셔와야지. 곤히 자고 있는 어린 양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홀로 방을 나선다. 잘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울려퍼지는 시끌벅적한 소음. 하아. 싫다 싫어. 역시나 처세술에 능한 이사님은 ‘젊은 여직원’ 가까이에 오시지도 않는다. 내가 술병을 드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잔을 받더니 고맙다 한 마디만 하시고 남직원이 가득한 안전지대로 멀찍이 도망가시더라고. 실장님도 마찬가지. 내가 다른 방에 있던 것도 몰랐는지 피곤해보이는데 그만 가서 자란다. 그 옆 구석에는 우리 과장님이 뻗어서 졸고 계시고. 하아.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그럼 저는 과장님 모시고 들어가보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드리고 일어서는데 내 팔뚝을 꽉 움켜쥐는 물귀신 팀장. 너 가기만 해보라는 눈빛. 그러던가 말던가. 벌떡 일어나는데 날 얼마나 꽉 쥐고 있던지 그 인간 엉덩이가 들썩이더라고. 흥이다. 눈치보던 다른 직원의 도움을 받아 과장님을 부축하고 나왔다. 그 와중에도 이사님 옆에 착 붙어서 코브라처럼 눈을 부라리던 부장.
"과장님. 이거 드세요.”
나오는 길에 주워온 숙취해소제와 생수를 따서 과장님께 건넸다.
“으아아앙. 그어마어… 근데 느어 왜 와써어…”
횡설수설하는 우리 논개 과장님. 같은 여자선배인데 참 다르다.
“과장님 모시러 왔죠.”
“으헤에? 징쨔아?”
망충미를 드러내며 웃는 과장님.
"오늘 고생하셨어요.”
내 말에 잠시 울컥한듯한 과장님이 갑자기 와락 내 품에 안기신다. 취하셨네. 취하셨어. 나도 선배도 토닥토닥.
“내가…이쨔나아… 스아실… 여즘 쩜…우욱.”
쓰담쓰담. 뒤에 이어질 말은 안 들어도 알 것 같아. 저두요. 저도 과장님 보러 회사 다녀요. 살다보니 선배를 달래주는 날도 오는구나.
“근데 팀장님은 어디 가셨어요?”
우리가 도망갈 동안 망을 봐주셨던 팀장님은 속이 안 좋아서 잠깐 베란다에 나갔다가 거기있는 의자에서 그대로 뻗으셨단다. 다음날 목이 안 돌아가서 막내가 파스도 사다드렸잖아. 아이고. 이런 것도 추억이라고 불러야하나. 어쨌든 이제 이런 꼴 안 보니까 얼마나 좋아.
내가 멍 때리던 사이 잔뜩 늘어져있던 쭈꾸미들이 꼬부랑꼬부랑 오그라들었다.
“저희 콩나물은 어떡할까…요?”
기본으로 같이 나오는 데친 콩나물. 여기서 스타일이 한번 갈린다. 저기 셀프코너에 가면 커다란 대접과 참기름이 있거든. 거기에 콩나물이랑 밥을 넣고 참기름과 쭈꾸미를 더해 슥슥 비벼 먹는 비빔밥파가 있고 철판에 넣어서 냅다 볶아버리는 볶음밥파가 있다. 선택의 시간. 결과는! 휘릭. 다들 볶음밥에 진심이었던 걸로. 마지막으로 콩나물까지 넣어 커다란 뒤집개로 슥슥 섞어주면 완성.
“먼저 드세요.”
후배님들을 기다리는 동안 재료를 스캔한다. 길쭉한 떡볶이 떡, 양배추, 콩나물, 쭈꾸미. 단출해 보이지만 군더더기 없는 주연들만 모여있네. 접시에 덜자마자 살짝 눌어붙은 떡부터 하나 먹어본다. 몸에는 안 좋다지만 원래 살짝 탄게 맛있어. 호아호아. 뜨거워. 칼칼한 고춧가루가 들어가자마자 턱이 얼얼해온다. 떡볶이떡보다 얇고 작지만 쫄깃한 밀떡. 이만한 애피타이저가 없지.
“맛있네요. 맞아요. 더 드세요.”
어째 대화가 뚝뚝 끊긴다. 아하하. 허허. 소개팅에 버금가는 어색한 웃음. 호탕한 대리님이 참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아오 팀장님. 저희 밖인데 그냥 반말하면 안 돼요? 저 이거 오그라들어서 못 하겠어요."
대리님의 폭탄선언에 나와 팀장님의 눈이 마주친다. 정말? 데굴데굴 굴러가던 눈이 팀원들의 표정을 살핀다. 다른 사람은 아닐 수도 있잖아. 구석에서 눈치 보던 주임님도 결심한 듯 자기도 반말이 편하고 좋단다. 미안하지만 신입직원인 네 말은 믿을 수가 없구나.
하긴 존댓말을 쓰니까 이상하게 우스갯소리가 안 떠오른다. 원래 점심시간에 헛소리를 해줘야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데 자꾸 일 얘기만 하게 되잖아. 아이고 나도 손발에 혀까지 오그라들어서 더는 못 하겠다.
“나 다시 반말한다. 너네 후회하지 마.”
빵 터진 직원들이 뒤로 넘어간다.
“그치! 우리 과장님은 이래야지! 낄낄!”
불편한 구두를 벗어던졌을 때의 그 쾌감. 크크 고마워. 날 풀어줘서.
"이 집은 맨날 와도 맛있다. 얼른 먹어 밥도 볶아야지.”
"너 여기 계란찜도 있어. 거기 덜어줄까?”
드디어 입이 터져버린 우리. 나를 따라 대리님들도 주임님께 말을 놓았다. 요것 봐라. 대리님 꼼수에 넘어갔구먼. 키키. 모범쟁이 팀장님은 아직 존댓말을 사수하고 계시지만 내가 볼 때 이거 길어봐야 일주일이야. 주말 지나면 다들 까먹은 척하고 다시 반말할걸? 아우 이제 밥 좀 편하게 먹겠네. 얘들아! 나도 깻잎 하나만!
깻잎에 탱글한 쭈꾸미와 빨간 양념에 절여진 채소들도 올린다. 저 생마늘도 하나 넣으면 맛있겠지만. 쯧. 양치를 해도 향이 남는 것 같더라고. 와앙. 후아. 오도독오도독. 쫄깃하면서도 질기지 않고 부드러운 쭈꾸미. 안 그래도 매운맛에 뜨거움이 더해져 혀가 아려오지만 이건 원래 이런 맛에 먹는 거야. 아작아작. 아직 심이 살아있어 아삭한 양배추와 콩나물이 씹는 맛을 더해준다. 겨우 쌈 하나 먹었다고 코에 땀이 맺혀오지만 화장 좀 지워져도 괜찮아. 어차피 회사에 잘 보일 사람도 없고. 열받았던 기억이 싹 가시는 불 맛. 이게 진짜 이열치열이지.
하아. 맵긴 맵네. 이럴 때는 요 뚝배기 계란찜을 한번 먹어주면 되지. 폭탄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계란찜 위로 아직도 후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이 집이 쭈꾸미도 잘 하지만 이 계란찜 맛을 못 잊어서 오는 사람도 많아. 빨간 양념이 잔뜩 묻은 숟가락으로 덥석 덜어가기가 미안해서 새 숟가락을 꺼내 접시에 덜어낸다. 그 모습을 보고 자기는 쓰던 수저로 그냥 먹어버렸다며 당황하는 막내. 괜찮아. 습관 같은 거야. 예전에 나 어렸을 때 그 헬리코박터파이로리인지 간염인지 옮는다고 접시에 덜어먹기 캠페인을 했었거든. 언제였지? 암튼 그때 생긴 습관이야. 맞아! 그런 거 있었어. 오랜만에 듣는다며 맞장구를 치는 대리님. 역시 동년배는 척하면 척이네.
맛있어 보인다고 덥석 먹었다가는 이 보드랍고 연약한 계란찜에게 호되게 당하는 수가 있다. 잘못 덤볐다가는 입천장이 다 까지고 심지어 전에 식도까지 데어서 이비인후과를 다닌다던 사람도 봤어. 호오호오. 마지막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충분히 식혀준 뒤 한입 먹는다. 우움. 움움. 만족스러움에 절로 끄덕여지는 고개. 맛있다. 거칠게 끓어올랐지만 누구보다 포근한 계란과 짭조름한 육수에 매운맛이 다 씻겨나가 버렸다. 아쉬워? 그럼 또 먹으면 되지. 히히. 이번엔 깻잎없이 쭈꾸미만 냠냠.
다행이다. 나만 이번 캠페인이 별로인 게 아니었나봐. 탱탱하게 튀어오르는 쭈꾸미를 씹는 기분이 개운하다. 뜻은 알겠어. 자기보다 아랫사람이라고 반말로 막말하고 하대하면서 인격적으로 모멸감 주는 진상들 많지. 부부싸움도 존댓말로 하는 게 낫다니까 효과가 있으려나 싶다가도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데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한 놈이 가면 더한 놈이 오는 회사생활. 거기에 다양한 민원부서를 겪으면서 날 힘들게 했던 건 말의 형태보다 그 말에 담겨있는 의도와 태도였거든.
안하무인 교양 빌런은 절대 반말을 하지 않는다. 자기는 논리왕이거든. 자신만의 도돌이표에 나를 가두고 인터넷 커뮤니티나 국민신문고를 무기삼아 어떻게든 사람 피를 말려서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게 목적이야. 나를 굴복시키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로 온갖 멸시를 퍼부으면서 이런 상황에도 존댓말을 쓰는 본인이 되게 교양 있는 줄 안다는 게 진정한 빡침 모먼트.
가끔 고령의 민원인들 중에는 반말을 섞어가며 전화하는 분들이 계셨다. 아가씨나 언니로 시작하는 그 통화는 처음엔 특유의 어투가 무례하게 느껴져서 반감부터 들지. 진상아닌가 겁도 나고. 솔직히 소통이 어려운 경우도 꽤 있었다. 그런데 얘기하다보면 구분이 돼. 이 사람이 날 괴롭히려는 건 아니구나. 나를 인격 없는 욕받이 쓰레기통이 아니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구나.
“아이고. 언니야. 고맙데이. 복 받으래이.”
정감가는 감사인사를 추임새처럼 곁들이는 그들과 통화를 하다보면 반말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고의아니게 나도 반말을 했지.
“아니 할머니! 영감 아니고! 인감! 인! 감!”
상사나 선배들도 마찬가지다. 반말 때문에 불편한 적 나도 있었지. 딱 봐도 나보다 한참 선배인 사람이라도 초면인데 대뜸 반말로 시비걸면 이 양반이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이런 생각부터 떠오르잖아. ‘야’는 또 어떻고. 저기요. 지금 저한테 야라고 하셨어요? 당장 도끼눈부터 뜨게 되잖아.
“여기 일은 할만 해?”
새 부서에서 쭈구리로 살던 내게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과장님이 대뜸 반말을 했다. 이렇게 반가운 반말도 있다니. 등을 대고 일하기는 하지만 팀이 달라서 오다가다 인사 정도나 겨우 나누던 사이.
일도 잘 하시고 친해지고 싶긴한데 그 카리스마에 기가 눌려서 감히 말을 못 걸겠더라고. 그런데 나한테 말을 놓으시다니. 세상에! 나도 모르게 방긋 웃는 얼굴로 덕분에 괜찮다고 답을 드렸다.
“뭐여.”
빵 터지시던 선배.
“됐고 우리 밥이나 한번 같이 먹자.”
네!!! 그 모든 말이 반말이라 좋았다. 드디어 날 동료로 받아준 것 같아서. 이제 이 정도 사이는 된다는 뜻 같아서.
나도 어느샌가 반말을 하는 후배들이 생겼다. 모두에게 그런 건 아니야. 아무리 내가 선배고 상대가 애기애기한 직원이라도 초면에는 반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자주 봐서 정도 들고 괜찮은 애네 싶어서 밥도 사주고 친해지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반말이 툭 튀어나가는 거지. 어 왔어? 이런 거. 일부러 사람을 가리는 것도 아닌데 오랜 기간을 함께해도 절대 반말이 안 나오는 직원도 있다. 그 후배를 마음에 안 들어한 적도 없고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닌데 참 신기하지.
그러는 나도 후배들과 일을 할 때는 의식해서 존댓말을 쓴다. 후배가 아닌 동료직원으로서 너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다는 의미로. 또 이렇게 보면 존댓말이 맞기도 한 것 같고 애매하네. 하지만 결국 이 문제도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이슈가 그렇듯이 사바사다. 사람 바이 사람. 그 말을 뱉고 있는 화자의 평소 행실과 태도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거지. 상대를 존중할 줄 모르는 막말쟁이들이 존댓말을 한들 얼마나 예쁜 말을 지껄이겠어.
아무리 배불러도 이건 먹어줘야지! 그럼그럼! 사장님 여기 밥 2개만 볶아주세요. 나의 외침에 사장님이 손을 내저으신다.
“아이고. 거기 테이블은 3개는 먹어야지!”
봐바. 이런 반말은 하나도 안 밉고 반갑잖아. 흐히히. 그럼 할 수 없지. 우리 먹깨비인 거 어떻게 아셨지. 키득키득. 반말 하나로 화기애애해진 우리. 재료를 들고 오신 사장님이 철판에 남은 요리를 앞접시에 툭툭 덜어주시고 찰박할 정도로 남은 소스에 볶음밥을 투하하신다. 잘게 썰린 김치와 김가루, 날치알, 참기름 그리고 저거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되는 거대한 밥덩이. 서억서억. 재료들이 어우러질 때까지 야무지게 볶아주신다.
“1분만 기다렸다 드셔.”
네! 꼴깍. 참아. 원래 맛있는 건 기다려야 해.
와! 지금이야 지금! 바삭한 소리와 함께 약하게 피어있던 불을 꺼준다. 빠드득 빠드드드득. 아까 접시 덜어먹기 어쩌고 하더니 다들 손에 든 숟가락으로 열심히 볶음밥을 긁어모은다. 흐흐. 근데 이건 누룽지를 긁어줘야 제 맛이야. 노릇한 그 비주얼에 가득 찼던 위장이 새 공간을 만들어냈다. 아무리 배불러도 이건 먹어줘야지. 후우하아. 고슬고슬 잘 볶아진 볶음밥. 톡톡 터지는 날치알과 소스에 코팅된 밥알이 입 안을 데굴데굴 돌아다닌다. 철판은 이 맛이지. 잠시 후 산같이 쌓여있던 밥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꺄르르르르. 후식으로 받은 요구르트를 손에 들고 요즘 유행하는 예능이야기에 다들 들떴다. 주제는 바로 내가 출연하고 싶은 연애 프로그램은? 그래 식후에는 헛소리가 최고지. 대리설렘이 유행이라는데 듬뿍 빠져보자 이거야. 그런데 주임님의 원픽에 다들 경악한다. 에에에? 아니 걔는 아니지. 인성이 너무 별로잖아. 주임님 얼빠구나? 세상에. 진짜 큰일 날 사람이네. 안 되겠다.
“주임님. 남자친구 생기면 나 한번 보여줘요. 내가 진짜 걱정돼서 그래.”
삐이이이! 사생활 터치 금지와 반말 금지 위반. 벌점 2점.
“아니에요! 그 사람이 다 사연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제대로 안 보셨죠?”
평소와 달리 물러서지 않는 막내. 말티즈 같아 귀여워. 키키. 우리말이 무조건 틀렸다며 바락바락 대든다.
“근데 너네는 귀찮아서 연애도 안 한다더니 그걸 왜 보는거야?”
한창 물오른 낄낄토크에 결국 참지 못한 팀장님. 어? 말 놓으셨다. 내 지적에 배 째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