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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와니 Aug 01. 2024

띡 or 피식

초단편소설


정전이 된 것은 어젯밤 10시경이었다. 날은 흐렸지만, 폭우가 쏟아지는 것도 강풍이 부는 것도 아니었다. 정전에 대한 예보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냥 띡 or 피식, 하고 꺼져버린 것이다. 우리 가족은 서로를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 제일 먼저 누나가 엄마를 불렀다. “여깄다, 엄마.” 그리고 엄마는 곧바로 내 이름을 불렀다. “준혁아.”


누나는 늘 엄마를 찾았다. 엄마! 내 양말 어딨어? 블라우스 어딨어? 엄마, 내 안경 못 봤어? 엄마는 늘 내 이름을 부른다. 준혁아, 밥 먹어라, 준혁아, 일어나라, 준혁아, 화장실에 불 꺼라, 준혁아, 일찍 다녀라, 준혁아. 하지만 어젯밤은 사뭇 달랐다. 뭐랄까, 애가 탄다고할까. 엄마는 꼭 한 번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른 적이 있다. 어릴 적 시장에서 파격 할인을 하는 옷을 정신없이 고르느라 나를 깜박했더랬다. 기껏해야 대여섯 걸음을 걸어 매대 반대편으로 갔을 뿐인데, 엄마는 나를 붙들고 울먹였다. 도대체 어디 갔었냐고. 아직도 떨리던 엄마의 음성이 귀에 선하다.


“네, 여깄어요.”


대답하고 나서, 책상에 앉아 있던 나는 일어나 벗어두었던 티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가로등들도 모두 꺼져 있어 그야말로 칠흙같은 어둠이었다. 그런 어둠 속에 맞은편 동 창문들이 감은 눈동자처럼 어렴풋이 걸려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물속을 상상하며 수면을 바라볼 때처럼.


“손전등 좀 찾아봐라. 아마 신발장 서랍에 있을 거야.”


나도 언젠가 그곳에서 손전등을 본 듯했다.


“알았어요. 엄마!”


나는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신발장으로 걸어갔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벽이 눈이 되기도 하네.’ 신발장에 도착한 나는 신발장 서랍을 열어 안을 더듬었다. 하지만 손전등 같은 건 잡히지 않았다.


“없는데.” 내가 소리쳤다.


“그래? 그럼 어딨지?” 엄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어디선가 손전등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확실해? 라고 누가 물으면, 확실히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엄마, 누나, 나, 우리 셋은 한동안 어디선가 본 듯한 그 손전등을 찾아 어둠 속을 헤맸다. 벽을 눈을 삼아.


“여보, 왜 누워만 있어?” 엄마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여보, 라이터 같은 거 없어?”


그때야 졸린 목소리로 아빠가 대답했다.


“그런 게 어딨어, 담배를 끊은 지가 언젠데.”


“그 많던 라이터가 그래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


엄마의 물음에 아빠가 껄껄 웃어댔다. 잠결에도 그 말이 웃긴 듯싶었다. 나도 조금 웃겼지만 웃지는 않았다.


“암흑천지가 됐는데 웃음이 나와요?” 엄마가 또 앙칼지게 따져 물었다.


“어차피 밤이잖아. 불 끄고 잘 시간이라고. 왜들 호들갑이야, 참.”


아빠가 이불을 뒤집어쓰는 것 같았다.


결국 손전등은 찾지 못했다.


우리는 거실 가운데로 모였다. 서로를 더듬더듬 만지며 무사함을 확인했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엄마와 누나의 얼굴을 보려고 애를 썼다. 어둠 속에 걸린 희미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자니 또 한 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가 한자리에 모인 느낌이었다. 누나도, 엄마도 그렇게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벽을 눈을 삼아. 나는 누군가 문기둥이나 책상 모서리에 된통 부딪히는 것을 상상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조심조심 책상 의자를 찾아 앉았다. 그때 책상에 놓여 있던 컵이 팔뚝에 부딪히며 엎질러지는 소리가 났다. 차가운 액체가 발가락을 적셨다. 그때야 오랫동안 그곳에 방치해 두었던 컵에 무언가 반쯤 남아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남아 있던 것이 무엇일까, 하고 떠올려봤다. 물? 커피? 아니면 또 다른 무엇?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쨌든 그동안 깨닫지 못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런 일이 올지도 모른다고 컵을 보며 아주 잠시 생각했는지도 모르지만, 미루고 그러다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나는 더듬거려 티슈를 뽑아 발만 대충 닦고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감았다. 갑자기 초등학교 시절, 모두 눈 감으라는 담임 교사의 명령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눈을 뜨고 싶었다. 무척이나. 왜 그랬을까.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손을 뻗어 어두운 공중에 걸린 손을 바라봤다. 손바닥에서 미세한 빛이 발했다. 나는 돌아누워 벽에다 손끝을 가만히 갖다 댔다. 귓속말하듯.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빠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단지 깊은 밤일 뿐이었다. 옷을 뒤집어 입은 채 잠이 들었다는 사실은 다음 날 아침에서야 알았다. 그런 내 모습을 거울로 바라보며, 어젯밤 정전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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