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이야기

어디선가는 있을 수도 있는

by 에탄올

모래빛의 고운 흙이 뒤덮인 마당 바닥에는 그날따라 스멀스멀 아지랑이가 피어있었다. 햇빛을 받아 밝은 마당 바닥과 일렁이는 아지랑이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눈두덩이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지레 눈살이 찌푸려졌다.


오늘이 워낙 더운 날일까, 복구(암놈이다.) 녀석도 그나마 그늘진 개집 안으로 들어가서는 머리 하나를 빼꼼 내밀지 않는 것이다. 복구는 두 달 전에 동내 숫캐놈과 정을 나누더니 새끼를 가진 듯 배가 잔뜩 불렀지만, 아비가 될 숫캐놈은 요 근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불쌍한 복구. 벌써부터 남편 없이 미망인과도 같은 신세가 되다니, 동물도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비열하고 비참하구나.


그리 생각하며 한명주는 멍하니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할 짓이 없었기에 마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저번주에 봤던 신문의 한구석에서는 이번 여름에 또다시 전국 최고 기온을 갱신할 것이라 적혀있고는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 끈적한 땀이 등줄기를 타고 쪼르르 흐르고, 등짝의 땀이 란닝구의 뒷면을 기분 나쁘게 축축이 적시는 것이다.


옷의 목덜미를 붙잡아 흔들며 옷 안에 바람을 불어넣고 있을 무렵, 대문을 두드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아들내미 '진수'일 것이다. 이윽고 한명주가 대문을 열자 보인 것은 예상했다시피 진수였고, 진수의 옆에는 진수와 손을 맞잡고 있는 꽤나 곱상한 여인이 서있었다. 꽤나 진한 화장을 보아하니 도시 여자들의 화장법을 어설프게나마 따라한 것 같았다.


"웬일이냐, 네가 여자를 다 데려오구."


"최근에 사귄 아인데, 날이 너무 더워서 제 집에서 같이 쉬려고 데려왔어요."


그리 말하며 아들 진수는 머쓱하게 웃으며 옆에 여인을 흘겨보았다. 여인도 진수를 마주 보며 눈웃음을 찡긋거리니, 꽤나 어울리는 한쌍으로 보였다. 이제 여자를 알 나이구나, 꽤나 뿌듯했다.


"어흠······, 알겠다. 우선 네 방으로 들어가라. 냉수 두 잔이면 되겠지?"


"당연하죠. 고마워요, 아버지."


진수와 한명주가 서로 마주 보며 시선을 나눴다. 잠시뒤 진수와 여인은 함께 진수의 방으로 들어갔고, 한명주는 냉큼 냉수 두 잔을 두고 방을 빠져나왔다.


'혈기왕성한 남녀가 방안에 단 둘이 있으면 할 것은 그것뿐이겠지······.'


얼마 뒤 집안의 공기가 조금 더 뜨겁게 바뀐 것만 같지만, 꼭 날씨 때문은 아닐 것이다.


******


언젠가, 비가 묵직하게 쏟아지는 날이었다. 마당을 두꺼운 빗줄기가 내리치는데, 마치 나무토막에 못질을 하는 것과 같은 묵직한 소리가 딱딱— 울렸다. 만약 외출 중에 우산이 없이 이러한 비를 마주했다면, 옷은 진작에 젖어버려서 몸에 윤곽이 드러나도록 쩍쩍 달라붙어있을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인지라 진수도 방 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았다. 요즘에는 그 화장 진한 여인도 만나지 않는 듯다.


복구는 엊그제 출산을 했다. 새끼 다섯 마리였다. 한 마리는 도중에 죽고 지금 살아남은 것은 네 마리뿐인데, 오늘은 비가 오니 남은 네 마리라도 살도록 복구와 새끼들을 따뜻한 집안에 들여놨다. 새끼들은 아직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핏덩이들이었다. 그리고, 복구와 정을 나눈 숫캐놈은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만 두드리고 끝났다면 빗소리에 묻혀 듣지 못했을 것이지만, 여러 번 두드리는 다급한 소리는 인지할 수 있었다. 대문을 열자 드러난 것은 바로 얼마 안 지난 과거에 보았던, 진수가 데려왔던 화장한 여인이 분명했다. 새하얗게 얼굴에 칠했던 분은 빗물과 뒤섞여 반들반들 광이 났고, 눈에는 마스카라가 녹아 흘러내리며 검은 폭포를 그렸며, 입술은 그 진하던 붉은색이 많이 옅어져 있었다.


"저기······ 진수 씨 좀 불러주세요."


"진수는 와? 무슨 일 있나?"


여인은 한명주의 물음에 우물쭈물하더니 이윽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진수 씨 아일 임신한 것 같은데······. 진수 씨가 절 계속 만나주지 않아요. 얼마 전에 소식을 전했더니, 그 이후로부턴 절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 있죠······."


여인의 말에 식겁한 한명주는 이내 진수를 찾으러 방에 들어갔다.


"진수야······. 그, 네 연인이 찾아왔는데, 임신했다카드라. 퍼뜩 맞이하러 가라."


"예? 아버지, 그 말 믿지 마세요. ······우선은 전 집에 없는 거예요."


"? 그래두, 한 번은 만나봐야 하지 않겠나?"


"······ 아이란 보장도 있어요? 그리고, 걔 좀 내쫓아 주세요. 제가 집에 있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고요."


"하지만······,"


(쨍그랑—!)


그때 진수는 옆에 있던 꽃병을 한명주의 바로 옆 바닥에 던졌다. 꽃병은 한순간 박살나고, 유리 조각은 그 주위에 불규칙적으로 비산했다.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아버지! 좀······!"


진수는 이를 악 물은 채 제 아비인 한명주를 향해 얼굴을 무섭게 찡그리고 있었다.


진수의 격렬한 반응에, 한명주는 결국 착잡한 마음인 채 다시 대문으로 돌아갔다.


"진수가 방안에 읎다. 아마 다방이라도 갔나 보지······."


"거짓말하지 마세요···! 진수 씨 방 안에 있잖아요!"


여인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갑작스럽게 대문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이내 한명주에게 제지 당해 뒤로 밀쳐졌다.


"아, 없다면 없다고 알지, 왜 남에 집에 들어오려고 그려! 그리구, 애초에 남자 좀 많이 만나본 것 같은데, 그게 진수 아란 보장도 있어?"


한명주가 그리 말하자, 여인 눈이 크게 떠지며 번뜩이는 것이다. 그것이 배신감을 느끼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명주는 여인이 멍하니 서있던 틈을 타서 대문짝을 쾅소리나게 닫았다. 문 밖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3시간 정도가 지나자 여인이 떠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명주는 마루에 드러누우며 깊이 한숨을 쉬었다.


"허참······."


처음에는 진수와 여인을 보고는 꽤나 잘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하여 언젠가는 꼭 좋은 보필이 되겠구나 싶었지만, 이게 뭐야, 이게.


한명주는 마음이 허탈해졌다. 지금껏 키운 것이 사실은 개만도 못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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