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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gsungg labnote Aug 17. 2024

언젠가 한 번쯤은 발표를 망쳤어야 했다.

과학자의 말하기. (5)

(22년 5월에 작성한 글을 기반으로 합니다.)


과학자의 말하기. (3) 글에서 언급한 망한 발표는 교수님의 개입도 문제였지만 전반적으로 내가 나의 연구 발표에 확신이 없었다. 온라인 줌 미팅으로 했기 때문에 청중들의 얼굴로 비치는 피드백이 없었다. 지도 교수님이 질문하느라 시간 다 잡아먹어서 청중 질문도 거의 없었다. 사실 피드백이 없으니 망했는지 안 망했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속에서 확신했다. "망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진짜 제대로 준비해야겠다." 내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포인트는 크게 두 가지였다.


번째로, 청중들이 어느 수준까지 상식으로 생각하는지 감이 없었다. 유전자 전사 과정은 상식인가? 특수 전사인자 단백질의 특징들은 상식인가? 구조생물학의 실험방법들은 상식인가? 이런 물음표들에 대해서 마침표를 찍고 발표를 시작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또한 전부 다 상식이 아니라 가정하고, 하나씩 내가 알고 있는 전부를 친절하게 설명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생명과학 연구자들은 열역학과 인 비트로 접근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후로는 나의 연구를 상식 수준으로 끌어오는 방식에 대해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수식을 사용하지 않고 수식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을까? 생물학적인 질문을 어떻게 해야 열역학적인 연구 방법으로 유도할 수 있을까? 열역학적인 연구 방법으로 나온 실험 결과를 어떻게 해야 생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번째로, 내가 내 실험 결과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다. 이게 과연 남들한테 보여줄 만큼 뭔가 의미 있는 그런 내용인가? 이런 건 그냥 다들 대학원 1~2년 정도 다니면 얻을 수 있는 그런 결과들 아닌가? 과연 이게 사람들한테 흥미와 중요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주제인가? 시간이 지나서 다른 연구실 학생들의 발표도 들어보니, 대단하지 않은 결과들을 가지고 미팅을 준비했다. 그리고 내 발표에 대해 더 객관적으로 지켜봐야 더 좋은 톡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비교할 다른 대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박사를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나 다른 연구실의 대학원생의 톡을 몇 개 들어봤다. 또한 내가 현실적으로 실현해 볼 수 있는 수준의 논문과 그 논문의 임팩트를 파악했다. 내가 엄청 못하고 있지도 않지만 논문 내려면 계속 정진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발표가 망하지 않았더라도 위 질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여러 톡과 논문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발표가 망했기 때문에 위 내용들에 대해서 훨씬 더 뼈저리게 고민하게 됐다. 교수님은 내 발표가 망했기를 내심 바랬던 것 같다. 논문 심사 같은 공식 행사에서 망치는 게 아니라 아니라 연구실끼리 모였던 비공식 행사에서 망치는 걸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교수님의 의도대로 한 번 넘어졌고, 도약하고 성장할 기회를 가졌다. 오히려 좋아.


개떡같이 준비해도 찰떡같이 성공하면 발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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