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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0년, 지구가 모래 폭풍으로 덮히는 더스트 시대로 인류는 거의 파멸 직전이었다. 시간이 흘러 2129년, 더스트 시대가 종식된 이후 식물생태학자로 일하는 아영은 식물 모스바나가 폐허의 도시에서 빠르게 증식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다. 모스바나에 대한 어릴 적 추억을 가진 아영은 그 뉴스에 호기심을 느껴, 모스바나에 대해 파헤친다. 모스바나에 대해 알아보던 아영은 모스바나를 약초로 사용했던 나오미와 아마라 할머니를 만나 인터뷰를 한다. 할머니들이 어릴 적에 겪었던 더스트 시대 이야기에는 사이보그이자 식물학자인 레이첼과 그를 수리하는 정비공 지수를 포함한 사람들의 작은 공동체가 있었다. 아영이 취재를 진행할수록 모스바나, 공동체, 그리고 더스트 시대에 대한 비밀이 하나씩 드러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SF 붐을 일으킨 그 유명한 김초엽 작가의 장편 데뷔작이다. 좋은 작품이라는 소문이 자자했고, 역시나 좋은 작품이었다. 역시 작가님이 이과생이라서 그런지 소설 속 연구자가 사용하는 어휘나, 소설 속 과학기사에 나오는 내용이 연구자의 입장에서 굉장히 자연스럽게 읽혔다.아이디어 하나로만 승부를 보는 작품이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의 감정과 선택이 충분히 공감되면서, 마지막에 드러나는 이 세계관과 등장인물의 비밀까지 치밀한 작품이었다. 더스트의 절정 시기에 레이첼이 지수에게 말하는 대사는 롤러코스터의 아찔한 내리막에서 느껴질만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영에게는 모두 소중한 연구 대상인데, 왜 하필 연구비를 들여 그 식물들을 복원하고 보존해야 하냐는 질문 앞에서는 늘 할 말이 없어지곤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맛있거나, 예쁘거나, 하다못해 약으로 쓸 수 있는 식물 외에는 더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작년부터 연구비 제안서를 작성할 일이 많았다. 모든 일이 그렇듯,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실험기구는 너무 비싸다. 3D 프린터로 바로 뽑을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플라스틱 부품이 10만원이나 한다. 화학 시약, 기기 수리, 실험 의뢰, 제정신 보존 등등 돈을 써야할 구멍은 많은데, 돈은 항상 부족하다. 작년에는 R&D 예산삭감으로 특히나 더 연구비가 부족했다.
여러 번 연구비 제안서를 작성하다보면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연구를 하는 건지, 연구비를 따내기 위해 연구를 하는 건지 불분명해지는 때가 온다.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우리 교수님은 대한민국이 과학강국으로 도약하고, 인류가 질병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연구 이런 실용적인 데에는 큰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런 실용적인 척을 하지 않으면 연구비에 선정될 수가 없다. 경제적이나 국제적으로 의미가 있는 연구라고 잘 포장해서 연구비 제안서를 작성해야 한다.
자연과학 연구자들은 이런 질문들을 궁금해한다. "담쟁이덩굴은 기둥을 잡고서 시계방향으로 돌까? 반시계방향으로 돌까?", "세포 핵막의 구멍은 비어있을까? 체같은 모양일까? 젤리같은 모양일까?" 솔직히 말해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 그냥 궁금하니까 연구할 뿐이다. 이 쓸모 없는 연구를 하는데, 담쟁이덩굴의 방향성으로 효과적인 지지 구조체를 설계한다던지, 세포 핵막의 구멍으로 약물의 투과성을 높인다던지, 어떻게든 쓸모 있는 척을 해서 연구비를 따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서경배연구재단은 정말 대단하다. 쓸모있는 연구는 연구비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 모집 요강에 떡하니 적혀있다.)
내성이 있다는 말은 모두 죽어가는 더스트가 가득찬 바깥에서도 안전하다는 뜻이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뜻이었다. 그 판단은 절반 정도만 옳았다. 더스트는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대신 다른 것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더스트가 아닌,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생명과학을 공부하면 어느 시점에는 꼭 한 번 접하는 질병이 하나 있다. 낫형 적혈구 빈혈증. 낫형 적혈구 빈혈증을 앓는 환자의 적혈구는 원반 모양이 아니라, 초승달 모양의 형태로 나타난다. 비정상적 모양의 적혈구는 온 몸에 산소를 원활히 전달하지 못해서 환자는 빈혈을 앓는다. 낫형 적혈구 빈혈증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생존에 불리하기 때문에 이 유전자 비율은 낮을 것으로 기대했다. 쓸모가 없는데 굳이 그 유전자를 갖고 있는 편이 생존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북서부에는 낫형 적혈구 빈혈증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말라리아 모기에 물려도 이 지역의 사람들은 말라리아에 의해 힘들어하지 않았다. 말라리아 원충은 정상 적혈구에 접합단백질을 유도하고, 이 접합단백질은 정상 적혈구끼리 엉키게 한다. 따라서 정상 적혈구를 지닌 사람들은 온 몸에 피가 제대로 순환되지 않아, 여러 병증을 앓는다. 하지만 낫형 적혈구는 접합단백질이 유도되지 않아, 말라리아에 대해 저항성을 갖는다. 즉, 낫형 적혈구 빈혈증 유전자도 말라리아 저항성이라는 쓸모가 있어 그 빈도가 유지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더스트에 내성을 지닌 나오미와 아마리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더스트가 없던 시절에는 생존에 작은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더스트가 나타나면서 그들에게는 더스트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쓸모가 생겼다. 쓸모없다고 판단한 형질도 특정한 상황에는 굉장히 쓸모가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그 쓸모가 발현될 수 있을만한 그런 특정한 상황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이 더스트에서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스트에서부터 보호될 수 있는 돔 바깥으로 쫓겨났다. 돔 바깥에서 더스트 내성자들은 범죄의 대상이 되거나, 먹을 것을 찾지 못하는 등 생존에 불리해졌다. 과연 더스트 저항성이라는 그들의 쓸모는 정말 생존에 도움이 되는 쓸모였을까.
왜냐하면 당신은 오래전부터 ... 했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그동안 그걸 몰랐던 사람들이 뒤늦게 알아내서 호들갑을 떨고 있을 뿐이잖아요.
결말 부분에서 아영이 레이첼을 만나 전하는 대사이다. (...) 부분은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지웠다. (...) 부분에 들어가는 내용은 소설 내내 레이첼이 했던 쓸모없는 연구라고만 해두자. 쓸모 없는 연구만을 수행한 레이첼을 내가 뭐라고 탓할 수는 없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연구도 경제, 보건, 국방 등 실용적인 면을 고려했을 때, 그닥 쓸모있는 연구가 아니라,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연구다. 이기적으로, 또한 과학 전반의 발전을 위해서는 당장의 쓸모를 위한 연구가 아니라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연구를 하는 게 맞기는 하다. 지금은 전지구적 위급상황인데, 쓸모있는 연구를 좀 해주면 안 되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쓸모없는 것들을 개발하다보니 우연히 발견한 결과가 더 좋은 효율을 내기도 하고...
CRISPR 라는 유전자 편집 기술이 있다. 그 전에 존재하던 기술에 비해서 훨씬 간단하고 경제적으로 유전자를 편집할 수 있다. 이 기술은 이상한 데서 처음 발견되었다. 세균이 외부 바이러스의 침입을 받아 공격을 받는 경우가 있다. 세균은 외부 바이러스를 물리치고, 그 외부 바이러스의 DNA를 세균의 DNA에 삽입한다. 다음 번에 비슷한 외부 바이러스의 DNA가 또 침입하면, 그 때는 세균의 DNA에 포함된 과거 침입 이력을 되살려, 면역 반응을 빠르게 일으키기 위함이다. 이러한 세균의 방어기작에 사용되는 기술이 CRISPR 기술이다.
이 기술을 처음 발견한 엠마누엘 카펜터는 대장균의 DNA와 대장균의 면역반응에 대해 궁금해서 연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 기술을 재조명한 제니퍼 다우드나와 팽 장은 대장균의 면역반응으로 유전자 편집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이를 실현했다. 그러니까 엠마누엘 카펜터는 오래전부터 쓸모없는 연구를 했을 뿐인데, 그걸 몰랐던 사람들이 뒤늦게 알아내서 호들갑을 떨었고, 그녀에게 노벨화학상까지 수여했다.
결말에 대해서. (스포주의)
"프림 빌리지는 해체되겠지.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이 온실은 유지되지 않겠지. 그러면 우리는 여기 더이상 남지 못하게 되고, 언젠가 너도 나를 떠나겠지. 이곳 밖에서 너는 유일한 정비사가 아니니까. 네게 개량종을 주지 않은 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였어."
이 대사다. 내가 충격 먹은 대사. 레이첼이 공기 정화 모스바나를 개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개량종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은 이유를 지수에게 답하는 이 대사. 지수와 같이 있고 싶었던 레이첼의 어색한 사랑이 프림 빌리지의 상황을 파멸로 이끌었다. 지수를 향한 레이첼의 사랑은 감정스위치를 작동시켜버린 지수의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과학 연구를 다루는 컨텐츠를 보면. 또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어보면 개인적인 삶과 그 과학 연구가 깊게 맺어져있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가 알츠하이머에 고통받고 있어,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만드는 혹성탈출 1편의 인물이나, 과학자 아버지의 군수사업을 보고 자란 개천재 아이언맨같은 경우 말이다. 그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감정이 간절하게 과학 연구를 하는 원동력이 된다. 소설 속의 레이첼도 마찬가지로, 지수를 사랑해서 공기 정화 모스바나를 개량했다.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내가 단백질 구조를, D램 반도체를, 이런 과학 분야를 너무나도 간절히 연구해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소설의 극적인 장치를 제작하기 위해서 개인의 이야기와 그 본업 연구를 연관시키는 경우가 많지.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연구자는 그냥 묵묵히, 또는 어쩌다가, 또는 한 질문에 꽂혀버려서 그 연구를 진행할 뿐이다.
그러니까 현실 세계에서 내 연구의 쓸모를 찾기 위해서 연구를 하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그 쓸모를 찾지 못하거나, 연구가 성공적이지 못할 때마다 연구자는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려서 연구의 실패에 더 힘들어할 것이다. 연구는 연구고, 연구자는 연구자다. 연구가 쓸모 없거나, 연구에 실패하더라도 그건 연구가 망한 거지. 내가 망한 건 아니다.
아래는 마음에 드는 문장들.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니까,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 중 선량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찾기 힘들겠지. 다들 조금씩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았어.
이 마법같은 식물들이 어떤 원리로 더스트를 견디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프림 빌리지는 거대한 기적이었지만, 기적이라는 말은 근원을 알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곳은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세워진 도피처였다.
전시회 내용은 과학을 잘 고증하기보다는 낭만적으로 포장한 신비주의에 가깝다는 것을 떠올리자, 그 즉시 감동이 차갑게 식고 말았다. 담당자는 "흥행을 위해서는 예술성이 가미되어야 하고, 너무 과학적이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