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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레 Aug 19. 2024

가난한 8 학군의 이민 Ep.4

개포동에서 대치동까지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쯤 우리 집은 이사를 가게 된다. 멀지도 않은 동네 천 하나를 건너면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환경적으로는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개포동에서 도곡동으로 동 이름이 변한 것뿐. 그것이 내 생에 첫 이사였다. 첫 이사와 함께 표면적으로 변한 것은 없었지만 우리 집안 내부적으로는 몇 가지 변화들이 생겼다.

첫 번째로 집 사이즈가 조금 줄어들었다. 구조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방 세 개에 화장실 하나이지만 방들의 사이즈와 거실 사이즈가 전체적으로 줄어든 것이다. 대리석 바닥도 없었고 카펫 또한 필요가 없었다.

두 번째로 파출부 아주머니가 더 이상 오시지 않았다. 그리고 운전기사 아저씨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안 계신 것에 대해서 나 개인적으로는 크게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지만 단순하게 오랫동안 같이 생활해 온 두 분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세 번째로는 외식하는 장소가 바뀌기 시작했고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덩달아 우리 삼 남매의 사교육도 일반 보습 학원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불편한 점을 느낄 수도 없었고 우리가 왜 이사를 했는지 왜 이러한 변화들이 생긴 건지 의문을 가져본 적도 없이 그 전과 같이 그저 하루하루 놀기에 바빴다. 학교를 다녀오면 축구나 농구를 하고 저녁에는 만화책을 빌려보고 형과 게임을 하거나 친구집에 가서 놀곤 했다. 그렇게 2년 정도 지낸 후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그 해에 나는 내 삶의 두 번째 이사를 하게 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같은 강남 안에서의 이사였으며 지난번과 같이 동네이름만 도곡동에서 대치동으로 바뀌었을 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으나 집이 조금 더 낡은 집이었으며 주차장 한편에 각 그랜저가 세워져 있긴 했으나 더 이상 운행을 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내 기억에서 잊혀갔다. 어릴 적부터 나는 형과 한방을 썼었다. 방이 늘 세 개였기 때문에 안방과 누나방 그리고 우리 형제가 한 방을 같이 쓴 것이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나도 내 방이 갖고 싶었지만 여전히 우리 집 방은 세 개뿐이었고 나는 결국 부엌 한편에 딸린 창고방이라도 내어달라 하여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였다. 그 작은 키의 중학생이 누우면 방 끝까지 다리가 닿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고 미닫이 문이라 외부와 완전하게 차단되지도 않았다. 아침만 되면 어머니가 부엌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잠을 깰 수밖에 없었고 마치 내가 이 집에 식모살이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시절 이후로 갑자기 나는 불만이 하나둘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나의 상황이 비교가 되면서 같은 동네에서 같이 자라온 친구들인데 무언가가 다르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껴가고 있었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눈에 보이는 차이가 생겨났다. 내가 5학년일 때 처음 피시방이라는 것이 생겼고 우리는 그때부터 피시방 세대가 되어 매일같이 피시방으로 출퇴근을 하며 놀았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그 중독성은 더욱 심해졌고 인터넷의 급격한 발달로 인하여 집에서도 온라인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컴퓨터가 없었다.

사실 그전에는 컴퓨터가 필요 없었다. 게임보이, 재믹스부터 시작해서 닌텐도, 새턴, 플레이스테이션 등 없는 게임기가 없었고 주로 밖에서 노는 스타일이었던 나는 컴퓨터라는 걸 알지도 못했고 원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이제 모두가 컴퓨터라는 것을 할 때 우리 집에는 컴퓨터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와 동시에 우리 집은 지금 컴퓨터를 살 형편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친구들은 겨울이면 스키캠프를 가곤 했다. 스키캠프를 가는 아이들 중에는 이미 어릴 적부터 스키장을 다녀온 친구도 있었고 그 해에 처음으로 시도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스키를 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나랑 어울리던 친구들이 다 가는 저 캠프에 같이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하지만 스키캠프를 가려면 캠프참가비뿐만 아니라 스키장비와 스키복이 있어야 했다. 그 당시 내가 때를 쓰며 스키캠프를 보내달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때 분명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냥 2박 3일 정도 혼자 놀고 있지 뭐’

그때가 아마 내 생에 처음으로 친구들이 ‘내가 없는 그들만의 추억’을 만든 케이스였던 것 같다. 그 2박 3일을 참고 기다리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었지만 그날 이후로 그 2박 3일의 스키장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강제적으로 소외가 되었어야만 했다는 것이 아마 어린 나에게는 더 힘들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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