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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현 Oct 30. 2024

가사노동의 재발견-빨래하기

세탁기의 발명이 자동차나 기차의 등장 이상으로 인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얘기하는 경제사학자들이 있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가사용품이 지구의 운명을 바꿔 놓은 운송 혁명을 뛰어넘는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했다. 인류의 역사 이래 가사노동에 묶여 있던 여성을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 새로운 인류를 창출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오랜 성별 분업 체계인 가사노동에서 여성이 벗어나면서 절반의 인류가 새롭게 등장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가사노동이 세탁기 하나로 해결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빨래는 가장 고통스럽고 진을 빼는 가사노동임에 틀림이 없다. 빨래만 해결이 돼도 가사노동의 부담은 상당 정도 경감된다. 


예전에는 빨래판이 없는 집이 없었다. 단단하고 긴 널빤지에 폭으로 깊은 홈이 줄줄이 파여 빨래를 치대는 판이었다. 홈의 요철이 빨래를 긁어서 치댈 때 빨래에 밴 때나 얼룩이 빠지도록 하는 장치였다. 그전에 비누질을 꼼꼼하게 해 비누와 물과 빨랫감 사이에 화학작용이 잘 일어나도록 치밀하게 조건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은 필수이다. 

비누질도 그렇고 치대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한다. 누구의 힘도 빌리지 못하고 온전히 사람의 동력만이 투여되는 노동이다. 치대는 것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빨래 방망이로 세차게 두들겨 패야만 하는 빨랫감도 적지 않다. 온 힘을 다해 치대고 방망이질을 하고, 자세도 편안하게 가질 수 없는 빨래는 그러나,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마무리가 남아있다. 가장 속에 있는 실올에까지 물을 밀어 넣어 마지막 때마저 빼내려던 안간힘을 이제는 반대로 돌려야 한다. 맨 끝에 있는 물기까지 빼내 빨랫감을 그 이전 상태로 온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빨래를 짜는 것은 지금까지 온 길을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되짚어 나가는 일이다. 손으로 하는 탈수는 온몸의 힘을 손끝에 모아야 하는 일이니 몸의 균형이 엉망으로 깨질 수밖에 없다. 손가락이 구겨지고 손목이 제자리를 빠져나올 만큼 빨래를 비틀어야만, 그것도 비틀고 또 비틀어야만 비로소 빨래는 끝이 난다. 

그래서 빨래는 말할 수 없이 몸을 무너뜨리는 중노동에 속한다. 한 꾸러미 빨래를 하고 나면 온몸이 쑤시고 흠씬 얻어맞은 것 같은 증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물론 나는 이런 경험을 해 보지 않았다. 빨래판만 있던 시절에는 가사노동에 힘을 보태기는커녕 가사노동을 보태는 어린애였다. 빨래판과 세탁기가 공존하던 시절에는 성별 분업의 ‘전통’ 뒤에 숨어서 구경하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씻고 아무리 찾아도 빨래판을 볼 수 없는 시대가 됐다. 그렇게 된 지도 오래돼 이제 빨래를 기계의 일이지, 가사노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나 모르겠다. 

요즘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는 빨래를 모아 두는 일, 세탁기에 집어넣는 일,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꺼내는 일 정도이다. 그것도 기계가 진행상황을 일일이 알려줘서 눈곱만큼도 신경을 쓸 일이 없다. 비누질에도 여러 차례 눈부신 혁신이 일어났다. 비누가 거칠고 단단해 빨래에 비벼대기도 어렵던 시절에서 지금은 빨래와 함께 액체나 가루를 한 숟가락 넣으면 끝이다. 화학물질이 알아서 옷감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때를 뽑아낸다 (빨랫비누 광고를 이렇게 옮겨놓다니!). 빨래는 사람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세상이 된 것이다. 

이렇게 고통의 시대를 건너뛴 후 나는 비로소 빨래에 손을 대는 상황이 됐다. 가족과 한동안 떨어져 지내게 된 것이다. 대단히 미안한 경우에 속하지만 그래도 세탁기 이후의 시대가 나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가끔 빨래를 하면서 (빨래를 들고 다니기만 하면서 빨래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좀 그렇다!) 예전 나와는 상관없는 듯 보았던 장면들을 떠올리면 ‘이것은 해방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가사노동의 진화는 요즘 두 가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자동화된 세탁을 더욱 편리하게 하는 방향으로, 또 하나는 아예 빨래라는 작업을 집안일에서 제외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전자는 세탁기의 성능을 더욱 높이고 건조까지 한꺼번에, 빨래와 관련된 모든 일을 일습으로 끝내도록 하는 쪽으로 향하고 있다. 빨래를 세탁장치에 넣기만 하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고 사람은 꺼내서 입기만 하면 되게 하는 완전 자동화가 목표인 것 같다. 

후자는 이른바 가사노동의 외주(아웃소싱)이다. 시장이 분화되고 많은 영역이 세세하게 상업화하면서 예전 같으면 당연히 집안일로 간주되던 것들이 외주화 되고 있다. 다른 이에게는 이것이 돈벌이의 영역이 된다. 사업자가 모은 빨래는 아마도 더 자동화된 과정을 통해 처리되고 다시 집으로 배달될 것이다. 적절한 비용만 치르면 자동화조차 필요 없이 가사노동 자체를 없애버리는 진화의 방향도 구축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사용하는 세탁기는 만들어진지가 제법 된 통돌이 방식의 기계이다. 소리도 꽤 나고 회전이 멈출 즈음에는 요란하게 흔들리기도 한다. 기능도 요즘 기계처럼 다양하게 세분화돼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더운물, 찬 물, 빨래 종류별, 선택도 가능하고 여러 단계를 차질 없이 거친 후 탈수까지 완벽하게 수행한다. 나는 빨래를 넣고 이어 비누를 넣고 작동 단추만 누르면 된다. 나의 기계는 모든 과정이 끝나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부르기까지 한다. 거기에 내가 약간의 ‘가사노동’을 더하면 빨래가 새 옷으로 변신한 뿌듯함과 보람을 누리게 된다. 

보통 주말 오전에 빨래를 하는 경우가 많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단추를 누르는 것까지 하면 나는 마치 언제 세탁에 신경을 썼느냐는 듯 전혀 다른 일을 한다. 1시간 정도가 지나면 세탁기가 알아서 작업이 끝났다고 삐삐삐 소리를 내며 빨래를 가져가라고 재촉한다. 꺼내온 빨래는 탈탈 털어서 빨래 걸개에 서로 겹치지 않게 널거나 옷걸이에 걸어 매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젖은 빨래를 가능한 세게 터는 것이다. 세탁이 되는 과정에서 구겨진 옷을 최대한 펴는 작업이기도 하고 남아 있는 물기를 마저 털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으로 나의 노동은 끝난다. 


그리고 외출을 하는 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보면 내가 없는 사이 많은 일이 벌어지느라 분주했던 집안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옷감에서 빠져나온 빨랫비누의 향과 습기가 엉키고 뒤섞여 집안 공기를 꿉꿉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들어서자마자 창문을 열면 집안을 부유하던 젖은 향은 뺑소니치듯 금세 빠져나간다. 

이제 노동의 결과를 향유하는 시간이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공기는 많은 일을 했다. 옷감 사이사이를 세밀하게 파고들어 숨어 있는 물기를 모두 뽑아냈다. 아침에 물매를 맞아 축 늘어진 것을 보고 간 옷들은 탄력을 되찾고 모두 깨어나 있다. 제 본모습의 두께도 회복했고 누가 숨을 불어넣은 듯 보송보송한 촉감까지 살아나 있다. 요즘은 소재가 좋아져서 자글자글했던 옷감이 물기가 빠져나가면 다림질을 한 것처럼 주름이 펴지기도 한다. 구김방지 옷은 털어서 너는 것으로 다시 새 옷이 된다. 

나는 특히 바짝 말라 바삭바삭해진 수건을 만질 때 공기의 열일에 감탄한다. 아침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사정없이 늘어져 있던 수건이 저녁에는 가장 꼿꼿한 자세로 살아나 있다. 얼굴을 대면 심지어 거만하게 기를 세우며 뻣뻣하게 살갗을 긁기까지 한다. 이런 신비한 변화가 내가 없는 사이에 집안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냄새가 부끄러운 듯 내가 들어오면 무거운 몸에도 불구하고 꽁무니를 빼 줄행랑을 치는 것이다. 


나는 세탁 노동의 앞단에 운반, 뒷단에 털어서 너는 정도의 아주 가벼운 기여를 하고 고단하고 힘겨웠을 전체 노동의 보람을 온통 향유한다. 나는 세탁기에 감사하지만 세탁기가 공감할리는 없다. 기계는 그런 것이고 그것이 엄청난 일일지라도 오로지 그것을 위해 발명된 것일 뿐이다. 

이 정도의 기계가 우리 주변에 있다면 가사노동의 진화는 후자(외주)보다는 전자(자동화)가 나을 것 같다. 노동 자체를 배제하는 것은 부담을 없애는 것이지만 그와 함께 그 결과가 주는 뿌듯함도 사라지는 것이다. 부담을 완화시킬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이용하고 보람은 즐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집안일은 일이기도 하지만 집안을 구성하는 하나의 기둥이기도 하다. 일이 모두 빠지면 집안이 있을 자리도 없어진다. 거침없는 외주의 시대에 집안까지 아웃소싱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우’가 오락가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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