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온 지 보름이 지나면서부터 남편의 몸이 좋지 않다. 몸살감기가 왔는지 콧물은 줄 줄… 기침도 심하고 온몸이 두드려 맞은 듯 아프단다. 기운도 쏙 빠지고 입맛도 잃어서 시름시름 앓는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에 와서 너무 힘들었다. 도착한 다음날 이삿짐이 들어왔으니 부지런한 남편 성격에 두고 볼 수 없는 일. 아들이 출근한 사이에 무거운 짐들을 이리저리 옮기고 조립하며 잠시도 쉬지를 않았다.
손주랑 놀아주기는 즐거운 노동이다
아들은 아들대로 모처럼 미국에 온 부모에게 좋은 곳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시간만 나면 시애틀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녔다. 시차적응이 안 돼서 밤에는 거의 잠을 못 자고 오전 내내 이삿짐 정리와 쓰레기 정리를 하다가 아들이 퇴근하면 아들과 함께 시애틀의 명소를 방문하거나 손주들을 데리고 가까운 거리의 공원에라도 나가는 것이 일상이다.
즐겁고 행복하지만 몸이 피곤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아들에게 우리는 몸이 좋지 않으니 너희들끼리 보고 오라고 하기도 미안하다. (자녀들과 여행 시 부모가 하지 말아야 할 말 중에 이 항목도 있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자주 오기 어려우니 있을 때 관광이든 쇼핑이든 하는 게 당연하기도 하지만 미국에서도 특히나 공기가 좋다는 시애틀에 와서 온 가족이 계속 기침과 콧물을 달고 사니 무슨 일인가 싶다.
미국 집 난방이 한국과는 달라서 밤에는 조금 추운 편이다. 바닥을 덥히는 방식이 아니라 바닥을 통해 더운 공기가 올라와 실내를 덥히는 방식이라 난방을 돌리면 공기가 건조해져서 목과 코가 마른다. 5살 손주 방에서 같이 자는 남편은 손주가 밤에 기침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아이를 돌보느라 꼬박 밤을 새우곤 했는데 며칠 저부터는 손주는 조금 나아졌는데 남편이 인후염으로 고생을 한다. 나도 밤에 기침이 나와서 저녁에는 진해거담제를 꼭 먹고 잔다.
정리를 기다리는 이삿짐
수시로 가려움증이나 콧물이 나는데 대부분은 알레르기 때문이란다. 하늘을 찌를 듯 키 큰 소나무가 많은 동네라 송홧가루 때문인지 이주한 지 얼마 안 되는 외지인들은 알레르기로 고생을 한단다. 일종의 풍토병인지 여기 살려면 겪고 넘어가야 할 과정인가 보다.
한국에서도 직장맘인 며느리대신 손주들 육아를 도와주던 나는 미국에 와서도 육아의 연장선이다. 한국에서는 저녁 8시면 우리 집에서 놀 던 손주들이 제 집으로 돌아가니 그때부터는 육퇴 후 자유시간이지만 미국에 오니 손주들이 잠들어도 퇴근을 할 수가 없다.
6시 반이면 일어나서 며느리를 도와 손주들 도시락을 싸고 손주들 등원준비를 돕는다. 두 녀석을 깨워서 씻기고 먹이고 입혀서 등교시키는 일은 전쟁과 다름없다. 나도 연년생 두 아들을 키운 엄마지만 두 손주를 돌보는 일은 만만치 않다.
아이들이 프리스쿨과 킨더가튼에 가고 나면 집안을 정리하고 장을 보러 가거나 근처 YMCA로 운동을 하러 간다. 한국에서는 어린이집에서 5시에 데려오면 되었는데 여기는 월. 화. 목. 금은 2시 30분. 수요일은 12시 30분에 픽업을 해야 한다. 데려다주고 돌아서면 데려와야 하는 시간이다.
장보기도 중요한 일정
그때부터 남편과 나는 일을 제쳐놓고 손주들과 놀아줘야 한다. 한국 같았으면 태권도나 수영강습을 보내겠지만 아직은 찾아보는 중이라 오로지 집이나 근처 공원에서 노는 것이 전부. 녀석들과 같이 해가 질 때까지 공놀이, 모래놀이, 도둑 잡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할 것이기에 더욱 최선을 다하다 보니 잠들 무렵이 되면 앓는 소리가 절로 난다.
그래도 나는 한국에서의 루틴을 유지하기 위해 글을 쓰거나 운동을 하는 시간을 빼기로 했다. 잠깐이라도 일기를 쓰듯 브런치 글을 쓰고 근처 YMCA에 등록을 해서 며느리와 함께 운동을 한다. YMCA 가족회원 등록을 하면 매일 운동을 할 수 있는데 수영 말고도 줌바, 요가, 인도댄스 등 강좌를 참여할 수 있어서 한국에서는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운동을 경험하는 재미도 있다.
각종 감기약을 수시로 먹은 남편
오후 5시가 되면 남편은 방으로 잠깐 출근한다. 한국에 있는 회사 직원들이 출근해서 보고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급한 일을 1~2시간 정도하고 나면 다시 손주들과 놀아준다. 미국 가면 골프도 치고 혼자 산이든 강이든 찾아다니며 놀겠다던 남편은 오히려 집을 벗어나지 못한다. 막상 혼자 가려하니 용기가 필요한 모양이다. 사실 남편은 혼자 노는데 재능이 없는 사람이다.
해외로 이주한 많은 사람들이 남자 혹은 남편들이 적응을 잘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는데 우리 남편을 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된다. 하루 종일 집안에만 머물거나 가족들하고만 지내니 답답할 수밖에 없지 싶다. 영어가 수월하지 않으니 어딜 가도 불편한 것투성이고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나 남편과 같은 <ISTJ>는 더 하다. 슈퍼든 놀이공원이든 사람이 많은 장소에 다녀오면 한동안은 진이 빠져서 힘들어한다. 그래서인지 감기도 잘 낫지 않고 매일매일 집에 가는 날만 기다리는 듯 보였다.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즐기기에 나는 너무 늙어버린 것 같아. 올 때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 기대를 하고 왔는데 한 달 살기도 힘이 드네. 뭔가 사람이 쓸모없어진 느낌이랄까. 손주들하고 있어서 즐겁고 행복한데 뭔가 답답해.”
영어는 나 역시 잘하지 못한다. 하지만 남편과는 달리 손짓발짓 바디랭귀지로 어지간히 소통을 하니 그리 답답하지는 않다. 미국 사람들이 친절해서 그런지 외국 할머니의 짧고 어둔한 영어와 바디랭귀지를 잘 기다려준다. YMCA를 다니며 운동을 하다 보면 친구도 금방 생길 것 같고 그러다 보면 못하는 영어도 늘어서 조금은 더 편해질 것도 같다. 어쩌면 외국 살이가 체질인지도?
나도 미국에서 일할수 있을 듯
미국 온 지 한 달 만에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보름 전부터 집에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더니 드디어 비행기를 탔다. 남편입장에서는 최대한 버티고 애를 쓴 한 달이다.
귀국 전 날 짐을 싸는 남편에게 한마디 했다.
“여보 한인마트에서 가져온 정보지에 보니 네니(육아도우미)도 구하고 88세 할머니의 말동무도 구하고 산후조리도우미도 구하던데 내가 딱 적합한 것 같아. 너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여기 취업할까 봐. 혹시 한 달 뒤에도 귀국하지 않으면 여기에 일자리 구한 줄 알아~~~”
“그래, 돈 많이 벌어서 한국으로 보내 줘. 친구들과 골프도 치고 여행도 가고 잘 쓸게. 나도 마누라 덕 좀 보면서 노년에 즐겁게 살아보자. 내가 노년에 복이 터지려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