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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Oct 03. 2024

영알못 할머니의 미국 두 달 살기

6. 스타벅스에서 실수, 이 커피가 네 커피냐

역시 미국 하면 커피인지 어딜 가나 스타벅스 천지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시애틀은 스타벅스 1호점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파이크플레이스라는 유서 깊은 상점거리에 위치한 스타벅스 1호점은 미국인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지 중 하나라 주말에는 물론 평일에도 길게 줄을 서야만 커피를 살 수 있다고 한다.

시애틀의 랜드마크인 스페이스니들

우리 가족도 그 행열에 줄을 섰는데 평일이라 기다리는 사람이 30명 정도밖에 없었다.  


1호점에 왔으니 당연히 1호점의 커피 맛을 봐야지. 내 입맛에 1호점 커피는 부드럽고 구수했다. 보통의 커피에 비해 쓴맛이 강하지 않은 것이 조금 다르달까. 1호점에서만 구입할 수 있다는 꼬리가 둘 달린 못생긴(?) 인어가 그려진 텀블러와 머그컵도 구입했다. 아들과 같이 있으니 굿즈를 구입할 때나 커피를 주문할 때나 아들이 대신해 주니 불편함 따윈 없었다.


부끄러운 일은 남편과 둘만 지인을 방문하러 샌디에이고를 잠시 다니러 갔을 때 일어났다. 남편과 나는 여행을 좋아해서 일 년에 한두 번 해외여행을 하지만 어디서든 영어를 쓰는 것은 늘 긴장되는 일이다. 특히 미국에 와서 미국말인 영어를 듣고 말하려니 동남아나 유럽 쪽에서 들어 본 영어보다 훨씬 빠르고 엄청 혀를 굴려서 매일이 듣기 평가다. 그러다 보니 커피 한잔을 마시려 해도 저들의 투머치한 질문에 답하려면 일단 심호흡부터 필요하다.


“how’s today?”


친절한 저들의 인사에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I’m fine thank’s and you?”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언제나 수줍은 미소뿐.

스타벅스 1호점에서 일하시는 할머니

기다리는 줄은 빨리 줄어들고 점원은 친절한 얼굴로 “무엇을 줄까?” 묻는다. 기다려라 우리도 메뉴판을 읽어봐야 한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돋보기를 쓰고 천천히 위에서부터 아래로 읽어 본다. 그런데 메뉴판이 낯설다. 나에게 익숙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핫 아메리카노도 없다. 이런 와중에 남편은 오후라서 디카페인을 먹어야 한단다. 디카페인이라는 항목도 메뉴판에는 없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일단 질러본다. 아들이 커피를 주문할 때 나도 속으로 열심히 따라 했었다.

파이어스 피크에 위치한 스타벅스 1호점

“원 아이스 아메리카노. 원 디카페인 핫아메리카노.”


“원 아이스 아메리카노, 원 핫아메리카노? 디카프?”


“예스”


사이즈는 어떤 걸로 주랴? 설탕을 주랴? 크림을 주랴? 이름은 뭐냐? 뭐 그리 물어보는 게 많은지 주문대 앞에서 벌써 진땀이 한 바가지다. 계산도 쉽지 않다. 카드를 어디에 끼워야 계산이 되는지 알 수 없다. 위에? 옆에? 아래? 더듬어 카드를 끼우니 화면에 팁을 몇% 줄지 누르란다.


 아무리 팁으로 사는 나라라지만 15% 팁은 너무하지 않나? 하지만 화면에 나온 글씨 중 제일 낮은 게 15%이니 15%를 누른다. 이게 맞나 싶지만 할 수 없다. 이런 불편함과 답답함 때문에 여행을 가면 언제나 영어 공부를 해야지 결심을 하지만 돌아오면 역시나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린다. 여기가 내 한계다.  


잠시 후 “킴" 소리와 함께 내가 주문한 커피를 받을 수 있었다. 여간 뿌듯한 게 아니다. 아들이 없어도 커피를 주문해서 마실 수 있지 않은가.

컵에 써있는 내용을 확인하자

저녁 시간에 안부전화한 아들에게 오늘의 스타벅스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팁을 잘 못 줬단다. 15% 팁을 주지 안아도 계산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화면 안에 X자를 누르면 팁을 안 주겠다는 뜻이고 OK를 누르면 계산이 되는 거란다. 미국이 팁문화가 발달했지만 가져다주거나 추천하거나 종업원이 어떤 서비스를 제공했을 경우에 팁을 주면 되고 스타벅스처럼 스스로 가져가는 방식의 패스트푸드점이나 커피전문점에서는 팁을 주지 않아도 실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쓸데없는 소비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인데.


다음 날 아침 또다시 스타벅스를 찾았다. 아들에게 조언도 들었겠다. 방에서 연습도 했겠다. 이번에는 다른 메뉴를 주문해 보기로 했다. 미국에서는 가을 시그니처 메뉴라는 펌킨스파이스. 이번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잔 펌킨스파이스 한잔 이렇게 세잔을 주문했다.   


어제 연습을 해서 그런지 주문이 매끄럽게 잘 된다. 미국 온 지 일주일 만에 영어 실력이  좋아진 것 같아 왠지 뿌듯하다.


잠시 후 주문한 커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스아메리카노와 뜨거운 아메리카노 그리고 펌킨스파이스 3개가 나왔다. 나온 커피를 챙기는데 직원이 물어본다.


“주문하신 게 이거 맞나요?”

 미국의 흔한 스타벅스

아이고 이 미국 사람이 누굴 핫바지로 아나 내가 아까 주문하고 지금 나왔으니 내 거지 누구 거란 말이야. 너무도 당당하게 “예스”를 외치고 심지어 트레이에 꼽아서(3잔이니까) 호텔방으로 들고 왔다.


그런데 두둥~~


첫째 잔을 마셔보니 펌킨스파이스가 맞는데 뜨거운 아메리카노여야만 하는 두 번째 잔이 또 펌킨 스파이스였다. 세 번째 잔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뭔가 싸한 것이 급 아까 매장에서의 상황이 돌려 감기로 스쳐간다.


두 여인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고 잘 생각해 보니 종업원이 나에게 몇 개 주문했냐고 물었던 것도 같고…  그리고 컵을 들어 확인해 보니 두 잔에는 2of1, 2of2 나머지 한잔에는 1of1이라고 쓰여있다. 말은 잘 못해도 글씨는 읽을 줄 아니 그나마 다행인가. 실수를 알아차렸다. 내가 주문한 커피가 아닌 것이다. 나는 뭐가 급해서 남의 커피를 들고 나왔을까. 조금만 여유를 가질 것을….  조금만 주변을 둘러볼 것을….


종업원도 커피를 기다리고 있던 두 여인도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웬 동양할머니가 다짜고짜 석 잔의 음료를 가져가 버렸으니 말이다. 종업원은 또 얼마나 황당했을까. 내가 잘 못 가져오는 바람에 두 여인이 주문한 음료를 다시 만들어줘야 했을 테니 말이다.

스타벅스 1호점 굿즈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내가 매장에서 한국말을 썼던가?’, ‘늙은 한국 여자가 진상짓을 했다고 욕하겠지?’ ‘어글리코리안이네' 이런저런 생각이 드니 너무 부끄러워서 커피맛이고 뭐고 입맛이 똑 떨어졌다.


실수를 했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 법. 용기를 내서 매장을 다시 찾아갔다. 우물쭈물 아까의 상황(중대한 실수를 한 상황)을 번역기를 찾아 짧은 영어로 말하고 미안하다고 하니 벌써 잊어버렸다는 듯 다시 한번 묻더니 별일 아니라고 한다. 나 때문에 새로 커피 3잔을 만들어 줬을 테니 그 값을 더 치르겠다고 했더니 아무 문제가 없으니 그러지 말라고 한다.


너무나 성급하고 염치없었던 나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를 받긴 했지만 나 때문에 자신이 주문한 음료를 늦게 받아가야 했던 두 여인에게는 사과를 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한 마음이다. 나중에라도 만나면 사과를 하고 싶지만 만날 일은 없으터. 지면을 통해서라도 사죄를 하고 싶다.


“미국 샌디에이고 스타벅스에서 만난 두 여성분 정말 미안합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제가 실수했습니다. 용서를 빌어요.”

이후부터 스타벅스에서 주문을 하면 항상 이름을 말하기로 했다. 워낙 바쁘고 주문도 많으니 종업원도 주문한 나도 헷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두 볼이 뜨끈한 실수다.


한국에서는 늘 뭐든 빨리빨리 하는 것이 당연했다. 남에게 차례를 양보하거나 몇 사람이 먼저 지나가도록 문을 잡아 주는 등의 행동은 우리에게 그리 익숙하지 않다. 미국에 오니 운전 중에도 멀리서 사람이 지나가도 미리 정차해 지나가도록 기다려준다. 어린아이와 함께라면 더욱 천천히 기다려준다. 운전이 미숙하고 길이 낯설어도 끼어들기가 어렵지 않다. 뒤차들이 끼어들 수 있도록 기다려주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가족들만 급하고 나 혼자만 바빴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늘 서두르고 마음이 급하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여유로움이 부럽다. 조금 느려도 조금 늦어도 조금 양보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천천히 느리게 해도 상관이 없을 나이가 되기도 했다. 이제 조금 여유 있게 천천히 사는 연습을 해봐야겠다. 나이가 들어서도 늘 배우는 게 인생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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