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온 지 2주일 만에 가져온 김치가 동이 났다. 한국에서 배추김치 4 포기(배추 1통)와 갓김치, 파김치를 조금 가져왔는데 한 달 미리 와 있던 아들이 그동안 먹고 싶었다며 매일 먹어 조지고 평소에는 해외에서도 김치가 없이 식사를 잘하던 남편도 아들집에 와서는 매 끼니 조금이라도 김치를 먹고 싶어 해서 한 달은 두고 먹을 것 같았던 김치가 두 주일 만에 바닥을 보인이는 것이다.
갑자기 귀해진 김치라 한국에서라면 버렸을 배추 뿌리 부분과 양념소, 국물까지 버리는 것 하나 없이 알뜰하게 먹는데도 김치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인다.
김치가 익는 시간(2~3일)을 생각하면 똑 떨어지기 전에 담아 두어야 할 터. 코스트코나 타겟, 트레이더조등 집에서 가까운 미국 마트에서는 배추는 팔지 않아 조금 멀지만 한인마트를 찾아가야 했다. 미국에서 배추를 사다니 얼마나 비쌀까? 비싸도 어떻게 해. 한국사람이 김치는 먹어야지.
한인마트에는 없는게 없다
한국에서도 배추값은 싸지 않았다. 우리가 미국에 들어오기 직전인 8월 말경 장마와 무더위가 계속되어 배추 1통에 12000원까지 올랐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당시 이마트에서 한통에 4천 원에 구입했던 것 같다. 한국도 1만 원 정도 웃도는데 미국은 그 보다 비쌀 수도 있지. 놀라지 말자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가격도 걱정이지만 배추도 무도 한국땅에서 자란 것 같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다. 토양이 다른 데서 자랐으니 식감도 맛도 다르지 않을까, 맛이 없으면 어쩌지? 걱정을 하며 한인마트에 들어서니 한국의 여느 마트와 다를 게 없다. 한국제품 중 없는 게 거의 없다. 다만 한국 식품들이라고 해도 수입된 것이다 보니 한국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 들고 오느라 힘이 들었지만 한국에서 멸치부터 물휴지까지 싹 챙겨 온 건 역시 잘한 일이었다.
미국에서 파는 배추는 어떨까 하고 살펴보니 우선 크다. 한국에서는 길이가 짧고 통통한 배추가 단맛이 나고 고소해서 그런 배추를 골라 샀는데 미국 배추는 큰 미국 사람들이 키워서 그런가 길이도 길고 잎도 두껍다. 그래도 배추를 살 수 있는 게 어딘가. 무는 신기하게도 생긴 것부터 미국무가 아닌 조선무다. 속은 어떤지 모르지만 겉모습만 봐서는 하나로마트에서 파는 무와 다를 것이 없다. 배추와 무를 사면서 둘러보니 쪽파도 있고 심지어 갓도 있다.
의류 정리 박스에 배추를 절였다
가격이 비싸지 않을까 했는데 한국에 비해 오히려 싸다. 온스 당 1.28불이라 커다란 배추 한 통에 8000원에서 10000원 정도면 구입할 수 있고 무 역시 1.29불이라 3~4천 원에 구입이 가능하다. 쪽파는 포장이 500원 동전만 한 묶음으로 작긴 한데 한 묶음에 1불 정도. 깐 쪽파의 가격이니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한국고추가 있긴 한데 엄청 비싸다. 한국에서는 물고추를 갈아서 김치에 넣는 걸 좋아했지만 미국에서는 생략이다.
배추 4 통과 무 2개, 갓 두단, 쪽파 5묶음을 7만 원 정도에 구입했다.
배추와 무를 사고 나니 양념소를 담을 대야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올 때 사골국 같은 것을 끓일 수 있는 커다란 들통을 가져오긴 했는데 스뎅대야까지 챙겨 오진 않았나 보다. 하긴 아들네 김치는 항상 내가 해서 나누어 먹었으니 그동안은 스뎅대야가 필요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다르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며느리도 제 손으로 김치를 담아야 할터. 스뎅대야를 구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한인마트에도 스뎅대야가 보이지 않는다. 이태리타월부터 이쑤시개까지 모든 게 다 있는 한인마트에 스뎅대야가 없다니…. 실망하고 있는데 며느리가 직원을 불러 물어본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듯 직원이 고개를 흔들자 얼른 스뎅대야 사진을 보여준다. 직원이 자신의 휴대폰으로 스뎅대야 사진을 찍고 다른 직원을 불러 물어보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2층에서 커다란 대야를 들고 내려온다. 눈부신 스뎅대야의 자태에 며느리와 난 넋을 잃었다. 미국에서 스뎅대야를 영접하다니…
3만원 정도 가격인 스뎅대야
중간 크기의 스뎅대야의 가격은 한국돈으로 약 3만 원 정도. 싼 지 비싼지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구매.
배추 4통은 옷이 들어있던 플라스틱 정리함을 비워서 절여두고 무와 쪽파등 양념소는 스뎅대야에 버무려 놓았다. 이렇게 한나절 절여서 속을 넣으면 김치 만들기가 끝이 난다.
오전 10시쯤 배추를 소금에 절이면서 5시나 6시쯤이면 충분히 절여질 걸로 예상했다. 잎이 두껍고 물이 많아 보여서 그 정도면 적당한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배추가 너무 세다. 한국에서 할 때처럼 소금물에 절이고 굵은소금을 충분히 뿌렸는데도 배추 상태에 변화가 없다.
저녁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배추는 밭으로 간다. 너무 짜게 절여지면 쓰고 맛이 없어서 적당한 염도로 맞추었는데 다 절여질 때까지 기다리려면 내일까지 기다려도 모자라지 싶어 저녁 8시쯤 배추를 씻어서 속을 넣기로 했다.
미국산 배추로 담은 배추김치
여전히 배춧잎이 빳빳하지만 나름대로 신선하고 시원한 맛이 있겠지 기대하며 김치통에 꼭꼭 눌러 담고 보니 밤 10시. 12시간에 걸친 김치대장정이 마무리 됐다.
한국 같으면 이틀정도 밖에서 익히고 딤채에 넣으면 적당한데 시애틀 기온은 좀 더 선선해서 그런지 5일이 지나도 많이 익지 않는다. 열어서 먹어보니 국물은 익은 냄새가 나는데 줄기 쪽은 여전히 배추 본연의 냄새가 강하다. 하루만 더 익혀보자. 엿새가 되는 날 저녁 열어보니 잘 익은 냄새가 난다. 한 포기를 꺼내 잘라보니 시원하고 아삭한 것이 맛있는 김치가 되었다. 한국 김치에 비해 물이 많고 아삭거리는 편인데 오히려 여름 김치처럼 시원한 맛을 내서 좋다.
한국도 배추값이 많이 올랐다는 뉴스를 봤다. 11월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김장을 해야 하는데 걱정이다. 이 참에 배추값싼 미국에서 김장을 해가지고 갈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