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에 버스를 기다리며 모여 있는 사람을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마 동의하지 않으실 겁니다. 같은 공간에 모여 있고 버스를 타겠다는 목적도 같지만, 그것은 단순히 우연일 뿐 이들을 공동체라 부를 수 있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버스를 기다린 지 1시간이 되어 서로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면 어떨까요? 그 장소를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버스를 타는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버스가 아닌 다른 방법을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면요? 그 방법을 공유하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면요? 그렇다면 혹시 우리는 이들이 ‘일시적’으로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 짧은 우화가 던져주는 몇 개의 질문을 통해 우리 사회의 공동체 이해 방식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살펴보며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려 합니다.
1. 공동체 정의(Definition of community) : 무엇을 공동체라 부르는가?
‘버스정류장에 모인 사람도 공동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공동체 정의와 관련이 깊습니다. 개인의 이동성에 제한이 많았던 과거에는 태어나면 속하는 가족이나 마을 같은 귀속적인 공동체에서 평생을 보내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일반 ‘사회’와 특수한 ‘공동체’가 어떻게 다른가를 구분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태어나서 평생 한 곳에 살다가 죽는데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사회라 불러야 할지 혹은 공동체라고 불러야 할지 모호할 만도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공동체가 위기라는 말은 최근에야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 처음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시도했던 19세기에도 ‘공동체 위기론’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유명한 ‘퇴니스(Ferdinand Tönnies)’라는 학자가 ‘사회(게젤샤프트)’와 ‘공동체(게마인샤프트)’를 구분하려고 시도한 것은 이 ‘공동체 위기론’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회와 구분되는 공동체의 특징을 확인하여 산업화 때문에 취약해진 전통적 형태의 ‘생활공동체’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특징을 확인해야 그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유지, 계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20세기에도 공동체란 무엇인가에 관한 탐구는 지속되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힐러리(George Hillery, 1955)’의 연구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공동체를 다룬 94개의 연구를 정리해서 공동체 특징의 공통점을 추출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가 ‘1) 공통의 지리적 영역을 기반으로, 2) 하나 이상의 공동 목표를 가지고, 3) 사회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정의입니다. 그러나 이 정의에 대해 디아즈(Diaz, 2000)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실 힐러리는 공동체의 각 정의에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말고는 특별히 겹치는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상 공동체에 공통된 정의를 내리기를 포기했던 것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알려진 정의는 공동체의 그나마 그중에 가장 많이 등장했던 공통의 특징을 기술적으로 정리한 것뿐이라고요. 그래서 일까요, 김미영(2015)은 힐러리의 공동체 정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힐러리가 도출한 공동체의 핵심은) 틀리지는 않지만, 아주 일반적이어서 그 개념으로는 사회나 집단이라고 써도 될 것에 공동체라는 말을 쓰는 병폐가 일어난다.’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을 이해해 보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회사는 공동체일까요?’ 매일 같은 공간에 출근해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일하고 사람들이 상호작용하고 있으니 분명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직장인에게 지금 다니는 회사를 공동체라고 생각하느냐 물으면 몇 명이나 ‘그렇다’라고 답할까요?
2. 공동체 의식(Sense of community) : 언제 공동체라고 경험하는(느끼는)가
직장이 공동체이냐는 물음에 ‘아니’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을지라도 모든 직장은 공동체가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 이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앞선 우화에서 함께 생각해 볼 두 번째 질문을 던져봅니다. 만일 버스정류장에 모인 사람들을 일시적으로나마 공동체라 부를 수 있다면 ‘버스정류장에 모인 사람들은 언제 서로가 공동체가 되었다고 느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깨닫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문제에 답을 찾고 해결하려 노력했을 때?’, ‘함께 찾은 답을 실행해 문제를 해결했을 때?’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답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 시점을 누군가가 외부에서 정해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를 정의하고, 공동체를 이론적으로 설명해 보려는 다양한 노력 끝에 20세기 중반에는 ‘이제 더는 사회에는 공동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견이 더 우세했다고 합니다. 사회는 더 복잡해졌고, 사람들은 머물러있지 않고 이동하며 살고, 개인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에 공동체적 삶의 방식이 잊혔다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공동체 존재에 관한 의심은 공동체 연구에 종말을 고하기보다는 현대사회의 공동체 이해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김미영(2015)은 이런 시도를 다음과 같은 말로 담아냅니다.
‘(공동체 연구는) 현대사회에 공동체가 가당키나 하냐는 도전적 질문과 그에 답하느라 사람들이 무리 짓는 온갖 것을 다 공동체라 존재 증명하는 불모의 한 쌍을 넘어 현대사회에서 공동체가 가능하다면 어떤 수준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라는 온당한 질문에 도달하는 궤적을 지닌다.’
온당하고, 새로운 질문의 궤적에 속하는 최근의 공동체 연구 중 하나가 아마도 맥밀런(Macmillan)과 차비스(Chavis)의 ‘공동체 의식연구(Sense of community)’일 것입니다. 그들은 현대사회의 공동체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으로 ‘개인은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무엇을 경험하는가’를 묻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도출한 4가지 특징이 바로 ‘멤버십, 욕구의 통합과 충족, 영향력, 정서적 연계’입니다. 이 특징들의 기능과 의미를 김미연 등(2018)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연구가 공동체를 다루지만, 공동체 그 자체의 특징이 아니라 그 공동체를 이루는 존재들 즉 사람들의 경험 차원에서 공동체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관한 연구이면서 그 질문의 우선적 관심은 ‘공동체’ 그 자체 아니라 거기에 속한 ‘개인’의 경험에 있다는 것입니다. 직장은 공동체인지, 버스정류장에 모인 사람들이 공동체가 될 수 있는가는 외부의 규칙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거기 모인 사람들의 경험에 의해 정의됩니다.
근대가 이룩한 개인화의 성과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의식에 대한 연구는 사람들은 자기 삶의 방식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는데 개인들이 그 자유를 일정 부분 희생하면서 공동체 되기를 선택하는 이유는 뭘까.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어떤 경험을 기대하고 실제 어떻게 경험할까를 살펴볼 수 있는 연구입니다. ‘현대사회에서 공동체가 가능하다면 어떤 수준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궁금한 분들이라면 관심 가지고 살펴볼 만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