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엑시트(Exit)’라는 영화가 흥행한 적이 있습니다. 화학물질이 유출된 도시의 재난 상황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이 그 위험을 탈출하는 줄거리의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단순 오락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다 본 후에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와 질문이 많은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인상적으로 본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의 초반 주인공 용남과 그의 선배 기백이 호프집에서 서로의 신세를 한탄하는 장면입니다. 두 사람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 취업이 되지 않아 고민입니다. 호프집에서 만난 그날도 용남이 면접에 떨어졌다는 문자를 받은 날이었습니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되는지를 모르겠어, 어렸을 땐 나도 장래희망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백)
“형이 그때 생각했던 장래는 애초에 지났고, 우린 그냥 XX 쓰레기야. 딴 애들 취업 준비할 때 우리가 뭐 했는데, 뭐” (용남)
그때 갑자기 호프집에 올리는 '삐~'하는 알림음. 모두에게 지진 관련 재난 문자가 발송된 것입니다. 용남은 지진 피해지역이 우리 동네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런 용남을 향해 기백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직 뭘 모르는구만, 너 지금 네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냐. 너 지금 재난 속에 있어. 지진 쓰나미 그런 것만이 재난이 아니라 우리 지금 상황이 재난 그 자체라고.”
위험사회와 개인화
기백과 용남의 대화장면을 보며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이론이 떠올랐습니다.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가 ‘우리 주위에 항상 존재하는 위험에 빠져있는 사회’라고 진단했습니다. 기백이 지적하듯 우리 사회는 말 그대로 ‘재난 속에 있는 사회’인 것이죠. 지진, 쓰나미뿐 아니라 실업, 비정규직, 양극화 등 사회 경제적 문제와 기후위기까지 겹쳐지는 복합적 재난사회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나요? 아무리 과거 전통사회와 현대의 위험이 피해 양상과 규모가 다르더라도 인류가 위험의 시기를 지나오지 않은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꼭 전 지구적인, 복합적인 피해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각 개인의 입장에서는 위험의 노출빈도나 그 강도에 있어서는 과거가 더 위험한 사회는 아니었을까요? 오히려 사회제도, 의료, 치안 등이 발달한 현대가 개인의 입장에서는 더 안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전통사회의 위험과 현대사회의 위험의 이해를 가르는 중요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바로 ‘개인화’라는 근대 이후 사회의 특징입니다. 울리히 벡은 근대 이후 중요한 변화를 ‘개인화’로 설명합니다. 전통사회가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사회라면 근대 이후는 개인이 중요한 개인화된 사회가 되었습니다.
울리히 벡은 이를 ‘표준적인 생애에서 선택한 생애로’의 변화라고 설명합니다. 내 삶이 정해진 경로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구성될 수 있다는 점은 전통사회와 근대 이후사회를 가르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반드시 모두가 따라야 할 표준적인 삶의 모습은 축소되고, 개인이 결정할 수 있고 또 결정해야만 하는 삶의 비중이 늘어납니다. 교육, 직업, 결혼, 주거, 자녀의 유무 등등 꼭 떠야 할 삶의 규범이 강요되지 않는 사회. 그 모든 것을 개인이 선택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립해 나갈 수 있는 사회입니다. 이제는 가족까지도 그 선택의 범주에 들어가곤 합니다. 원 가족에서의 분리 그리고 새로운 인간, 비인간 주체들과 새로운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인류는 따라야 할 규범 혹은 구속에서의 ‘해방’을 맞이했고, 그 자유는 너무나 중요하고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울리히 벡은 또 동시에 이렇게 말합니다. ‘개인주의화 된 사회에서 개인들은, 불이익을 영구히 감수한다는 조건으로, 그 자신 또는 그녀 자신을 그/그녀 자신의 생애, 능력, 지향 관계 등과 관련된 행동의 중심이자 설계소로 간주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공동체 중심의 사회였던 전통사회는 위험을 맞이하는 주체도 그 위험을 극복하는 주체도 모두 ‘공동체’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아마 과거였다면 기백과 용남의 경우처럼 공동체 안에 일이 없어 놀거나 굶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수치가 아니라 공동체의 수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내 삶에 대한 의사 결정의 주체가 ‘개인’이 되면서 위험이란 ‘내가 무언가를 잘 선택했다면 혹은 더 노력했다면 피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 내게 위험한 일이 닥치게 되었다면, 그 책임도 나에게 있다’라는 명제가 성립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난문자가 개인에게 발송되는 것도 그 문자로 인해 나는 괜찮다며 ‘안심’하게 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용남도 우리가 취업하지 못한 것은 남들 취업 준비할 때 한 것이 없는 스스로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다른 이들은 자신의 삶을 계획적으로 스스로 기획하여 살아간 반면 자신은 그렇지 않았기(혹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체념을 합니다.
개인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유는 좋지만, 세상에 상존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누구나 자기 삶의 기획자가 되어야 하는 시대. 개인의 실패한 기획은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 시대. 그것이 '위험사회'의 본질이며 그 사회를 사는 우리가 지고 있는 딜레마입니다.
위험사회와 공동체사회의 망령
그렇다면 개인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우는 위험사회를 건너기 위해 우리는 다시 옛 공동체 중심의 사회로 돌아가야 할까요. 아무리 공동체적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공동체의 좋은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무리입니다. 울리히 벡은 베버의 비유를 빌려 ‘근대화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다음 모퉁이에서 내릴 수 있는 승용차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이룩한 평등, 자유, 개인의 삶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로 변화한 세상의 시계를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정치적 변화들을 보면 마치 그런 주장이 힘을 얻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개인화와 자유 등 현대사회의 가치가 내면화된 유럽 등 서구 사회에서 조차 극우적인 정당이 힘을 얻고, 때로 지배적 정당으로 당선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말입니다. 주로 이런 정당들이 내세우는 가치가 과거 전통사회의 역할이었던 민족 내적 결속,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적인 정체성을 제공하는 것 들입니다. 세상을 ‘우리’와 ‘우리 아닌 것’으로 가르고 문제의 책임을 우리 외부로 돌리면서 강한 내부의 결속력을 유지해 사회의 위험을 극복해 나가려는 전략입니다. 일례로 프랑스의 극우정치인 르펜의 유명한 구호가 ‘르펜이냐 지단(알제리계 프랑스인)이냐’이기도 했죠.
문제는 그렇다고 개인만이 중시되는 사회도 답은 아닌 것 같다는 점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공동체주의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은, 인간적 가치의 필수 불가결한 한 쌍(자유와 안정) 가운데 안정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방향으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진정 통렬한 추세에 대한 응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현대사회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안전장치의 공급은 빠르게 위축된 반면, 개인의 책임의 크기는 전례 없는 규모로 급증’한 사회라고 진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 우리는 사회가 양 극단으로 치닫는 것에 대해 위험을 감지하고 지금 시대에 맞는 사회로의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유부단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아마 우리의 답은 양 극단의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입니다. 한 개인의 삶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공동체도 존중받을 수 없다는 생각. 가족, 지역, 사회 등 공동체가 지속가능하지 않고서는 내 삶도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연결감. 그 속에서 내가 나답게 살아가는 것을 서로 지지해 줄 수 있는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지지할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위험사회를 함께 건너기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난 8월 헌법재판소에서 내린 하나의 결정이 떠올랐습니다. 국내 첫 기후 소송이자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정부의 기후문제 대응 정책이 일부 헌법에 어긋난다는 판결이 나온 것입니다. 헌법재판소는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 제8조 제1항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조항은 우리나라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40% 범위에서 감축한다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2050년까지의 목표를 수립해야 함에도 2031년에서 49년까지의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담고 있지 않아서 미래세대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결한 것입니다. 2030년까지의 감축 목표인 40% 감축이 기후 문제 해결에 있어 불충분한 목표라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새로운 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데에서 기념비적인 판결이 내려졌다 볼 수 있습니다. 이 헌법소원의 청구 당사자는 다양한 시민 주체들이었습니다. ‘청소년기후행동’ 회원 청소년 19명을 비롯해 어린이 성인들은 물론 아직 태어나지 않은 20주 차 태아 1명까지 총 255명이 원고로 참여했습니다. 지구 기후가 아무리 변화해도 나는 돈이 있어서, 기후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살아서 삶이 조금 불편해졌을 뿐 이 위험이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가능 한 문제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만 있다면 이러한 변화는 시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작가이자 사회비평가인 리베카 솔닛은 그의 책 「멀고도 가까운」에서 우리의 삶을 동화에 비유하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동화에서 '힘' 자체가 살아남기에 적합한 수단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보다는 힘없는 이들이 연합하여 성공을 이룰 때가 많은데 이는 종종 서로에 대한 친절한 행위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동화는 힘없는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거대해 보이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단지 아이들이 보는 동화라고 치부하기에는 이 이야기의 구조는 우리의 삶의 이야기와도 닮아있습니다. 삶의 문제를 개인에게 책임 지우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만한 힘을 채 갖추지도 못한 상태로 세상에 나아가게 됩니다. 어떤 문제들은 혼자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속에 맞닥뜨리게 되기도 합니다. 리베카 솔닛은 이럴 때,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큰 위험,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이 더 많은 힘, 개인이 뛰어난 능력을 길러내는 데 있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보다는 힘없는 이들이 연합하여 성공을 이루는 것. 즉 연대하고 협력하여 서로에게 친절을 베푸는 관계를 이루고 함께 노력하는 것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진, 쓰나미뿐 아니라 실업, 비정규직, 양극화 등 사회 경제적 문제와 기후위기까지 겹쳐지는 복합적 재난사회에서 우리가 역경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열쇠는 ‘누군가에게 내가 공동체가 되어주는 것’에 있습니다. (‘공동체’ 그 자체가 아님에 주의합니다.) 둘, 셋이 모여 함께 무찌를 '괴물'을 향해 '물러가라'외치는 함께하는 목소리가 되어주는 것. 누군가 용기 내어 한 번 소리 내면 주변에서 같이 소리 질러줄 사람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한 삶의 선택을 함께 짐 져주고, 그 삶이 지속가능하기를 바라고 곁에 있어줄 사람들을 기대하는 것이 나약한 생각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그 대답 속에 우리가 함께 위험사회를 건너갈 수 있는 해법이 있지 않을까요.
참고자료
울리히 벡(2006). 위험사회. 새 물결
지그문트 바우만(2022). 액체현대. 필로소픽
리베카 솔닛(2016). 멀고도 가까운. 반비
‘절반의 승리?’ 국내 첫 기후위기 대응에 대한 헌법소원, 그 판결내용은(2024.08.29.) BBC코리아 (https://www.bbc.com/korean/articles/c935jp27qv4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