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다. 종종 그런 소망을 가졌던 기억을 떠올릴 때가 있다. 아이와 같이 떠오르는 해를 보고 싶다. 내가 경험한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다. 어린 시절에 내가 보았을지도 모를 책을 읽어 주고 싶다. 같이 자전거를 타고 싶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버지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대한 절망 때문도 아니고, 둘만의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아이 없는 삶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질 수 없는 일이었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무리가 되는 일이었기에 나는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지나간 것에 후회를 크게 두지 않는다.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한 집착도 그리 크지는 않은 편이라 생각한다. 마음의 부담은 없었다. 흔히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자녀가 축복이라거나 부모되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훌륭한 어른들을 두고 있으므로 그것을 강요하는 목소리도 없었다.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우리 둘을 고민에 빠뜨리는 분들이 아니었다.
얼마 전 기차 안에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영화를 다시 보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훌륭한 다른 영화들이 많지만 나는 이 단순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이가 있었다면 나는 두 사람의 아버지 중 어떤 아버지에 더 가까웠을까. 릴리 프랭키가 연기한 자유분방한 아버지,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연기한 엄격한 아버지. 현실은 그 어딘가를 왔다 갔다 하며 분투했겠지만 영화는 그 둘 사이를 갈라 선명하게 대조해 보여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떤 모습이 더 낫다가 아니라 ‘변화’에 있다고.
영화는 아버지들의 특성을 대조함과 동시에 낳은 정과 기른 정의 선택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결과적으로 기른 정이라는 과정으로서의 사랑을 선택하게 되는 결말은 되어 가는 과정으로서의 아버지됨, 완성되어 가는 사랑으로서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듯하다.
영화의 잘못은 아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과거에 이 영화를 보며 상상했던 세계속의 내가 떠올랐다. 영화는 마치 내게 ‘아직 맡아 둔 것을 찾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홀로 됨을 스스로 즐기는 사람은 아니기에 어떻게든 그 맡아 둔 것을 끝내 찾아야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에 공동체에서의 관계와 의무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것도 이런 상황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많은 부분 육아 중심의 가정에 용이한 관계맺음의 방식을 어쩌면 나는 질투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용이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부족함과 무심함을 변호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더 다정해야 한다고, 마음에 두고 있는 관심을 표현해야 한다고. 그래야 덜 외로워진다고.
언젠가는 나는 아이가 없으니 온 마을 아이들의 삼촌이나, 때로는 혈연이 아니라도 나의 아이들처럼 품는 사람이 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정수 형이 꼭 그렇게까지 책임지려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준 적이 있다. 그 말이 의외로 큰 위안이 되었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아버지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내 삶의 빈자리는 아닐 것이다. 부재한 경험에 대한 감정이 나를 때때로 붙잡지만, 그 감정이 반드시 나를 결핍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감정 속에 머무르기보다, 그것을 지나 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