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보고 두 개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는 얼마 전에 본 슈카월드 내용이다. 20대 청년의 결혼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 수치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낮았다. 3%. 전체 20대 연령대 사람들 중 결혼한 인구의 비율이 3%라는 것이다. 오늘 센터에서 2030대 직원들과 이야기하다가 물어보니 대부분 15~20% 정도 아닐까 하고 답했다. 그것도 낮은 수치인데 실제는 3%였다. 1985년 20대 결혼비율이 49% 었다고 하니 40년 만에 16배 낮아진 셈이다. 30대로 시선을 돌려도 그 비율은 50%를 넘지 못한다. (85년에는 30대가 되면 97%가 결혼했다.)
두 번째로 떠오른 장면은 오래전 청년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하면서 들었던 한 인터뷰의 말이다. “몸을 둘로 갈라 나눌 수도 없는데 생계와 활동을 어떻게 동시에 할 수 있느냐.” 도시에서 1인가구로 살며 하루 대부분을 생계에 쏟아야 겨우 삶이 유지되는 현실에서, 사회나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과거라면 가족이라는 완충 장치가 있었다. 삶의 분업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단위이자 개인과 사회가 곧바로 맞닿지 않도록 완충지대가 되어주는 곳. 가족이라는 옷을 입고 마을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도시화 이후 사회에서 ‘공동체와 마을에 관심을 가졌던 청년’이 실제로 존재했는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내가 경험한 청년 시절은 2000년대 초반 이후이기에, 그 이전 세대에 대해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짐작하건대, 만약 예전 시대에 ‘공동체와 마을에 관심을 가진 청년’이 있었다면, 그는 가족을 이루고 그 가족을 기반으로 자신의 공동체를 유지하려 했던 이들이 아니었을까. 혹은 적어도 그런 전망을 갖고 삶을 계획해 나갈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과거 부족한 복지 체계를 상호부조로 해결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여겨졌던 것은 그 중간에 ‘가족’이라는 완충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이 벌거벗고 혹은 개인과 공동체가 기울어진 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옷을 입고 만날 수있었다. 과거에는 마을에 존재했던 그 가족들의 아빠 엄마 대다수가 ‘청년’이었다. 과거 마을활동, 돌봄활동, 생태활동, 먹거리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청년성만을 기억하고 가족의 서포트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안타까운일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다. ‘아니, 가족은 내가 챙겨야 할 대상이었지 나를 서포트해주지는 않았다’고. 그렇다면 그런거겠지만… 가족안에서의 분업화, 생산단위로서의 한국사회 가족의 기능을 생각해 볼 때 그 활동을 했던 주체가 오롯이 ‘나, 청년 개인’만이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문제는 지금이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약화되었고, 청년 다수는 더 이상 가족을 통해 공동체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족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할 다른 안전망은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 사회 전체는 분업과 상호의존으로 고도화된 연결 속에서 굴러가지만, 정작 청년은 완충 지대 없이 사회와 곧바로 부딪힌다.
그렇다고 해서 청년이 공동체를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글에도 나오지만, 나 역시 청년들이 ‘공동체’ 혹은 ‘커뮤니티’라는 이름의 소속감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은 무엇보다 ‘안전’을 추구한다. 가치관이 맞는지, 언어가 통하는지, 들고 남이 자유로운지 꼼꼼히 따져본다. 삶의 요구들을 분업화하고, 리스크를 함께 나눠줄 다른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실패했을 때 피해를 복구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다. 몸을 둘로 갈라 생계와 무관한 일에 겨우 참여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 자원의 투여를 어디에 할까 선택할 때 무엇을 얻을 지 모르고 불확실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투자할까 아니면 예상가능한 만족감을 보장하는 소비에서 대안을 찾을까.
여기서 마을공동체를 생각해본다. 찾아오는 청년은 어떤 기대를 하고 오면 좋을까. 마을은 그 준비를 하고있나. 혹시 여전히 정상가족의 이상향을 깔아놓고 그 공간에 청년, 1인가구, 다양한 삶의 형태를 불러 모으려는 것은 아닌가. 필요한 것은 가족 중심주의의 시대 이후에도 작동할 수 있는 새로운 완충 장치, 새로운 연대의 방식일 것이다. 실패해도 돌아올 수 있는 공간, 지나치게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구조, 생활 기반에 맞닿아 있는 구체적인 상호부조. 그것이 없다면 청년은 여전히 공동체를 동경하면서도 끝내 마을이라는 문 앞에 서지 못한 채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