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 씨가 나에게 "여기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 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내가 내 삶의 방향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은 오히려 나를 더 깊은 혼란과 불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고통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조용하고 한적했으며, 대부분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만 살고 계셨다. 또래 친구가 없어 나의 어린 시절은 늘 혼자였다.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쁘셨고, 학교가 끝난 후 집에 돌아오면 언니와 나 둘 뿐이었다. 언니마저 바쁘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건 오직 그림뿐이었다. 그 작은 손으로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림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위로가 되어 주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림은 나의 재능으로 자리 잡았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나는 늘 미술 동아리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고, 자연스럽게 미대를 꿈꾸며 그림을 진로로 삼았다. 나에게 그림은 단순히 취미를 넘어 나를 살아 있게 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아빠의 사업 실패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가정의 경제적 상황은 급격히 어려워졌고, 나는 미술을 전공할 꿈도, 대학 진학의 길도 포기해야만 했다.
부모님이 내 꿈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안해하셨다. 하지만 누가 봐도 그림을 배우고 대학을 준비할 형편이 아니었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학은 나중에 제가 돈 벌어서 가면 돼요." 그렇게 말하며 19살에 나는 건축사사무소에 취직했다. 젊고 에너지가 넘쳤던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림을 향한 열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1년 뒤, 나는 더 많은 시간을 나 자신에게 투자하고 싶어 퇴근 시간이 정확한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한 시간이라도 내 시간을 확보해 다시 그림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회사 일과 그림, 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현실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생계를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나의 꿈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야. 내가 선택한 거야."
하지만 그 선택은 나를 점점 무너뜨렸다. 지금 이곳, 크레모나에서 다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으라는 말을 듣고 나니, 오랜 시간 억눌렀던 감정들이 폭발하듯 밀려왔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은, 마치 얇은 얼음 위를 걷는 듯한 불안감을 내게 안겨주었다. 나는 그 질문이 너무나 두렵고 고통스러웠다.
그날 이후 나는 반복적으로 악몽을 꾸었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학원을 다니며 입시를 준비하던 동아리 친구들이 떠오르는 꿈이었다. 그들은 힘들다며 불평하면서도 화구통을 들고 씩씩하게 다녔다. 나는 그 화구통이 너무나 갖고 싶어서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던 내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꿈에서 깨어나면, 나는 한없이 초라해지고 무력해졌다. "내 존재의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나를 짓눌렀다.
길을 걷다가 차에 부딪혀 죽어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내 삶은 어둡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어릴 적 내가 품었던 꿈은 깊은 어둠 속에 묻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꿈을 다시 끄집어낼 수 있을까? 나는 과연 그때처럼 그림을 그리며 열정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걸까?
지금 이 순간, 크레모나에서의 삶은 나에게 가장 무겁고 고통스러운 시기로 느껴진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질문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나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