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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ssy Aug 18. 2024

당신이 나에게 주는 건 동정인가, 연민인가

안면장애인의 삶 2

 이전 글에 이어서 이번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당신이 나에게 주는 건 동정인가, 연민인가. 이 질문은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한 책에서 이러한 내용을 본 적 있다. 동정은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연민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기반한 것이라고. 그렇다면, 대부분 나를 보는 시선은 ‘동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겪은 불행에 대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었으며, 내가 겪은 일을 자신이 겪었다면 그냥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첫인상이 사람과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말은 나에게 뭐랄까, 사람과의 관계를 포기하라는 명령처럼 느껴졌다. 나는 첫인상에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은 적이 없다. 초등학생 때는 나와 버스 자리를 같이 앉는 것을 꺼려했고, 중학생 때는 쉽게 약자의 프레임이 써졌으며, 대학생 때는 사람들의 기피를 받는 것을 피하고 싶어서 오히려 내가 더 사람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웃긴 점은, 사람들이 나의 첫인상을 안 좋게 생각하는 만큼 나도 그 사람의 첫인상을 안 좋게 가진다는 점이다. 나를 향한 시선에서 그 사람이 주는 거리감이 느껴질 때면 나도 그 사람만큼 거리감을 느낀다. 그 사람이 나를 동정하는 만큼 (아니, 사실 그건 동정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혐오감이었다) 나도 그 사람을 동정한다. 첫인상, 외모로 쉽게 혐오감을 표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장애를 가지기 이전의 나는 어땠는지 떠올리곤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같은 학급에 손가락이 성장하지 않고 그 부위가 위축된 학생이 있었다. 내가 급식 당번이라서 그 학생에게 급식을 나누어주는데, 손가락이 안 보이게 뜨거운 급식판 아래로 손을 받친 채로 급식을 받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뜨거울 텐데 손가락이 부끄러워서 급식판 아래로 손을 받친 거라면 편하게 급식판을 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도 같이 뜨거움을 느끼고 그 친구의 부끄러움을 고민하고 연민했다.

 

 이런 나에게는 공감보다도 ‘다름’의 시선이 먼저 온다. 너는 나와 달라. 나는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 나에게는 저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아. 그 시선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약자가 되고 만다. 그런 시선 속에서 나는 나의 불행이 나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잘못된 사고를 가지고 만다. 사고가 일어났던 건 내가 열두 살 때였다. 실제로 열두 살의 아이는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 전혀 없다. 자고 일어나니 가족이 사라졌고, 나는 얼굴을 잃고, 집을 잃었다.

 

 격하게 말하자면, 나를 쳐다보고 있는 당신의 시선은 아무 잘못 없이 장애를 가지고 가족을 잃은 열두 살짜리 어린아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가? 당신의 호기심으로 인해 육체적으로 망가져버린 삶이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져 가는데? 나는 장애 등급을 받고 수년이 지나 내 장애를 인정할 때까지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참고 살아야만 했다. 앞서 말한 시선, 말, 상처, 나를 향한 외면들까지도.

 

 앞으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내가 말하는 것들이 다소 격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장애인의 현실이며, 앞으로 당신이 장애인이 되었을 때 겪을 수 있는 현실이다. 피해의식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하철만 타도 버스만 타도 나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은 나를 흘끔흘끔 보고, 이십 대 초반의 학생들은 화상이 덮인, 그렇지만 손잡이를 멀쩡하게 잡는 내 손을 보고, 오육십 대 아줌마 아저씨들은 나에게 혀를 찬다. 이게 나의 현실이다. 나의 현실을 제발 연민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번만이라도 같은 마음으로 봐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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