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 때부터 영상을 제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평소 하루에 반절은 음악을 소비할 정도로 애정이 남달랐던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추천해 주고 싶은 싶은 욕구가 생겼다. 편집이라곤 하나도 몰랐지만 인터넷에서 무료 편집 프로그램을 찾아 영상을 만들었다. 반복적인 작업에 지칠 법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알릴 수 있다는 마음 덕분에 그 시간이 너무나 즐겁게 느껴졌다.
첫 영상을 업로드 한 날, 시청자의 댓글을 내심 기대했지만 하나도 달리지 않았다. 유튜브를 만만하게 생각했나 보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포기했을 텐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계기로 인해 “어떻게든 영상에 댓글을 달게 만들 테야 “ 악착같은 마음으로 영상을 업로드했다. 음악의 저작권 때문에 아쉽게도 수익 창출은 하지 못했지만 하루에 1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올렸다. 힘이 들 때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밤을 새우면서까지 나는 침대에 누워 노트북으로 작업했다. 하루에 많으면 연속으로 2개도 올렸던 적이 있었고 3개도 올렸던 적도 있다.
30개의 영상을 올렸을 때 즈음이었을까, 외로운 댓글 창에 어떤 한 시청자의 댓글이 달렸다. “좋은 음악을 소개해 줘서 고마워요.” 그 이후로도 수많은 영상에 “오늘도 좋은 노래 감사합니다, 이 노래 정말 좋아요” 등 힘이 나는 응원이 달렸다. 비록 한 분이었지만 나의 공간은 덕분에 활기로 가득 찼고, 빛과 희망으로 채워나갔다. 239개의 영상을 올리며 50명이었던 구독자는 어느새 1971명이 되었다. 점점 나를 찾아주는 손님들이 많아졌다. 시청자들은 내가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 나이가 몇 인 지도 모르는 나에게 성원의 댓글을 남겨줬다.
영화 입시에 뛰어들다
어쩌다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비디오그래퍼 안대훈 님의 여행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주로 자신의 여자친구 모습을 전문적으로 자신의 영상에 담았는데, 마치 영화 같은 색감과 탄탄한 구성력, 그리고 호흡이 척척 맞는 음악 선정으로 단숨에 그의 작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나도 이런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한 계기로 영상 제작자라는 꿈이 생겨 영상과 관련된 과가 있는 대학교를 찾아보던 중에 한 학교를 발견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상과에 입학하고 싶어졌다. 지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당장 영상 학원을 알아봤다.
다른 학원들은 한 달에 60만 원이 넘는 반면, A 학원은 한 달에 40만 원이며 수많은 합격생을 배출해 낸 학원이었다. 선택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거리도 집에서 한 시간이고 나쁘지 않아 나는 바로 상담을 받았는데 방송영상과와 영화과를 같이 준비하는 것이 어떠냐고 원장님의 설득에 나는 그만 넘어가 같이 수업을 병행하면서 듣게 되었다.
방송영상과 수업을 듣는데 매일 반복되는 작문 연습이 적성에 맞지 않아 흥미를 잃어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관심이 없었던 영화과 수업에는 조금씩 재미를 느끼고 있었고, 그 마음이 영화를 하고 싶다는 다짐으로 변하게 되었다.
수업 시작 전, 선생님과 한 주 동안 감상한 영화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비록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수업 중에 그 시간만 손꼽아 기다렸다. 누군가와 영화에 대해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참 좋았다. 영화과 수업이 참 즐거웠다.
412편의 영화를 감상하면서 그만큼 사랑하는 영화도 많이 생겼다. 애프터썬, 애프터 양, 컴 앤 씨, 디태치먼트, 중경삼림, 델마와 루이스, 위플래쉬, 더 파더, 레퀴엠 등 대중적으로 명작이라 불리는 영화들을 접하면서 난 더욱더 영화가 좋아졌고 언젠가 내 시나리오를 토대로 각자 삶의 고난을 헤쳐나가는 3명의 인물들이 우연히 열차에서 만나 위로를 건네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다.
영화과에 입학하고 싶어 부원장님의 특별 클래스 수업을 신청했다. 모의 면접, 이미지 분석, 작문, 영화 감상평 등 정말 하라는 거 빠짐없이 다 했다. 매 수업에 다 참여할 정도로 간절했다. 남들과 같이 빡세게 면접에 임하였고, 영화사를 나만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시대별로 나열하며 필기했다. 또한 아이패드 메모장에 내가 쓴 시나리오, 시놉시스 기출문제, 면접 팁들, 영화사 정리, 편집 용어, 촬영 용어, 연출 용어, 면접 문항 등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전부 정리했다. 메모 데이터 용량으로만 무려 15GB를 차지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결론적으로 내가 원했던 대학교에 불합격했다. 실패자가 아니라고, 이런 걸로 무너질 내가 아니라며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인스타그램스토리에서 대학 합격증을 올리며 자랑하는 친구들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부러운 감정이 들었다. 내가 욕심이 과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입시 기간에 써놓았던 일기장을 다시 펼쳐봤다. “영화가 너무 밉다. 미워도 어찌하리. 사랑해야지.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하지만 사실 아니다. 밉지 않다. 아직도 영화가 너무나 좋다. 이 바쁨과 힘듦, 스트레스 때문에 너무 밉지만 그럼에도 난 영화가 참 좋다 “ 애처롭고 처연한 필체로 적혀있었다.
그렇다. 내가 공부했던 7개월의 기간 중 쓸모없던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나는 이런 걸로 무너지지 않는다. 절대로.
나의 이야기
2023년 2월,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치킨집 아르바이트에 지원했다. 부모님의 지원 없이 생활비를 벌고 싶은 것이 이유였다. 단정한 옷을 입고 공백으로 가득한 이력서를 들고 면접 10분 전에 도착했다. 매니저가 말씀해 주시는 안내사항을 갖고 온 수첩에다가 받아 적을 만큼 패기가 넘쳤다. 하지만 그전에 단기로 몇 번 뛰었던 전단지 아르바이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쉴 틈 없이 울리는 호출 벨과 끝이 보이지 않는 설거짓거리들. 주문을 받을 때마다 난 긴장의 연속이었다. “실수하면 어떡하지? “ 두려운 마음 때문에 주문을 까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포스기에서 11번 테이블에 결제를 했어야 했는데 잘못하고 10번 테이블에 결제했다. 손님이 매장 밖을 나가고서야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아 황급히 뛰어가 사정을 설명해 드린 뒤 환불을 해드렸다. 또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손님의 테이블을 모르고 치웠던 적도 있었고, 서빙을 하다가 치킨을 바닥에 엎었던 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무서웠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내가 점점 실수가 잦을수록 눈치와 핍박을 주기도 했다. 살아남기 위해 다가가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소외감만 쌓일 뿐이었다. 하기야 매니저> 직원> 알바 순의 서열 관계에서 꼴찌였던 나의 예견된 결과이기도 했다.
그 이후부터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무능력한 나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치부하며 혐오했다. 일이 끝난 다음 날에는 깨질 듯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는 화산같이 뜨거웠다. 증상을 치료하려면 병원에 가야 하고 병원을 찾으려면 인터넷에 검색을 해봐야 한다. 이렇듯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귀찮았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내일이 되면 출근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잠을 설치기도 했으며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차에 치였으면 좋겠다는 상상까지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친구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왔다. 원했던 수능 성적이 나오지 않아 이번 년에 재수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친구가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일단 지금은 푹 쉬는 게 나을 것 같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몇 분 뒤에 휴대폰 알람이 울렸는데 음식을 서빙하느라 일이 끝나고 새벽이 돼서야 확인을 했다.
”우리 일본 가자“
나는 1초의 고민도 없이 좋다고 답장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도쿄에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