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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구 Aug 12. 2024

정말 보고 싶었어, 홍콩.

공항 철도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오니 숙소까지는 걸어서 13분. 지하철역에서 나오자마자 34도에 육박하는 무더운 날씨와 숨 막힐 것 같은 습도에도 나는 경비를 아끼기 위해어쩔 수 없이 택시 대신 걷는 것을 택했다.


처음으로 혼자 가는 여행이니까 걱정이 많아 쓸데없는 짐들을 챙겨 온 게 화근이었다. 전문가인 척 멋져 보이기 위해서 커다란 삼각대를 가져온 것도, 고작 4박 5일 여행인데 앞뒤로 메는 가방을 두 개나 챙겨 온 것이 영향이 컸다.


무거운 캐리어를 끙끙 끌면서 지도의 방향으로 문제없이 걷고 있었다. 왼쪽으로 꺾어 맞은편으로 이동한 뒤, 쭉 직진하면 도착이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횡단보도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주변을 계속 서성이다가 건물 위에 연결되어 있는 다리를 발견했다.


“이제 끝났다” 한숨을 푹 내시고 올라가려는데 계단만 있고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몽땅 비를 맞으면서 캐리어를 들어 올렸는데 하필 우산이 캐리어 안에 있어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다리 한복판에서 캐리어를 열어 우산을 꺼냈다. 정말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나오더라.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 나는 어른이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어찌 15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30분 만에 숙소에 도착했다. 카운터 직원은 몰골이 말이 아닌 나를 보더니 빠르게체크인을 해주었다. 숨을 고르고 엘리베이터 거울에서 본 내 모습은 정말 초라하게 그지없었다. 오늘 처음 입은 새 옷과 바지는 빗물로 흠뻑 젖어있었고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여행은 이게 아닌데.. 여행 시작부터 이게 뭐야.. “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입고 있던 옷을 싹 다 벗고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샤워했다. 가느다란 물줄기에 끈적거리는 몸을 적시니 묻었던 땀과 빗물이 하수구 안으로 씻겨 내려간 듯 개운했다. 나는 갖고 온 짐을 풀고 정리하고 난 뒤에 가족들에게 무사히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세상 밖으로 나가니 마법이 일어났다. 하늘을 뚫을 듯한 압도적인 건물들의 스케일, 로컬 느낌이 나는 허름한 가게 간판, 좁은 간격의 인도에 비해 엄청난 인구 밀집도, 영국에서나 볼 법한 2층 버스, 붉게 칠해진 홍콩 택시, 도로에 깔린 트램 레일.


아, 이거 행복 맞구나. 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구나. 이런 풍경을 본 순간 홍콩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었다. 영화 속에서나 봤던 장면을 실제로 보니까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어서. 여름을 싫어하는 내가 이곳에서만큼은 여름을 좋아할 것 같았다.


배가 고파진 나는 근처에 에그타르트로 유명한 타이청 베이커리(泰昌餅家)로 이동하던 중 길을 헤매고야 말았다. 분명 지도상으로는 앞으로 쭉 가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도저히 앞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날이 너무 더워 불쾌지수가 올라가던 참이라 용기를 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여쭤봤다.


“Excuse me. Where is the Taicheng Bakery?“

(실례합니다. 타이청 베이커리가 어디에 있나요?)


그러자 밀짚모자를 눌러쓴 어느 현지인 분이 어딘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하시더니 나를 단숨에 목적지 앞까지 데려다주셨다. 나는 연신 광둥어로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머리를 숙였다. 땀으로 흠뻑 젖은 이마를 옷소매로 닦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주황색 계열의 밝은 불빛 아래 선반에는 수많은 빵들과 기념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갓 익은 구수한 에그타르트 냄새에 그만 녹아버려 밀크 타르트와 에그타르트 각각 1개씩 주문하니 직원분이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정성스럽게 포장해 주셨다.

밖으로 나오자 숨이 턱 막히는 뜨거운 열기로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 힘겹게 더위와 싸우며 걷고 있는데 도저히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아 근처에 보이는 세븐일레븐에 급하게 들어갔다. 잠시 숨을 내신 뒤 주위를 둘러봤다.


낯선 광둥어로 쓰여있어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과자들, 정신없이 혼자 손님을 상대하고 있는 카운터 직원, 사람 한 명이 들어가기도 벅찬 협소한 공간. 그래서인지 취식할 수 있는 곳또한 아기 손바닥처럼 소박했다.


더위를 충분히 삭힌 뒤 시원한 냉기가 나오는 진열대에서 맛있어 보이는 비타 소이 두유를 냉큼 집었다. 자색 고구마 맛이 진하게 풍기는 두유로 외국인 또한 호불호 없이 즐기기 제격이다.


그러고는 푸딩같이 통통 튀는 부드러운 에그타르트를 반으로 가른 뒤 한 입씩 먹었다. 반죽이 고소해서 겉은 바삭했고 속은 달걀에 수분이 풍부하니 촉촉했다. 천천히 음미할 시간도 아까워 순식간에 해치우니 입가에는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있었다.

조촐한 점심을 해결하고 조금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나는 활짝 열려있는 편의점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한낮에 울려 퍼지는 공사장 소음, 일정한 간격으로 끊임없이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발소리, 가벼운 배낭을 메고 어딘가로 향하는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 그동안 각박한 삶에 지쳐있어서 그런 걸까. 현지인들에게는 익숙한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하고 놀라운 풍경. 나는 무더운 여름 속에서 솔솔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를 맞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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