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고 힘들땐 내게 기대 언제나 니 곁에 서 있을께
안녕하세요.
이제 어느덧 저도 40대가 되어 그날이 생각나요.
1990년대 카카오톡도 라인도 없는 그 시절 SKYPE도 있었지만 나에게 핫한 메신져는 ICQ라는 메신져 였습니다. 들어보신적 있나요? 그당시 고등학생인 나에게는 아는 사람과의 대화보다 랜덤쳇(Random Chat)이라는 기능으로 지구 어딘가에 사는 나처럼 호기심 많은 누군가와 대화 하는게 너무나도 재미있었어요.
그곳이 어디인지, 그곳은 몇시인지, 그곳은 저녁밥으로 뭘 먹고, 주말에는 뭘하는지.
인터넷은 있어도 지금과 같은 속도와 정보가 없던 시대에는 다른 나라에 사는 누군가와 대화 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도 신기한 일이었죠. 나는 당시 인구 5만명정도의 작은 미국령 섬에 살고 있었으며 그저 섬 밖의 세상이 너무나도 궁금한 10대 청소년이었습니다.
주말이 찾아와 변함 없이 세상 어딘가의 누군가와 대화하려던 어느날, 나는 뉴욕이라는 영화에서만 보던 도시에 사는 40대 아저씨와 쳇팅을 하게 되었어요. 뉴욕은 밤이었고 그 아저씨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I just wanted to talk with someone before I die....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저씨는 그날 밤 자살을 할 계획으로 죽기전에 ICQ의 랜덤쳇으로 대화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했어요. 그저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을 털어놓고 싶었대요. 아쉽다고나 할까 죄송하다고나 할까, 죽기전에 아저씨가 대화하게 된 사람은 호기심 밖에 없는 청소년인 저 였어요. 다소 심정이 복잡했지만 저는 진지하게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요.
아저씨는 1950년대 대한민국의 남북전쟁의 영향으로 미국에 입양된 전쟁입양아라 하셨지요.
미국의 부유한 가족에서 좋은 교육과 사랑이 넘치는 양부모를 만나 매우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랐다고 했죠. 다만, 미국인으로 자라도 아저씨는 동양인이었고, 모국어인 한국어도 한국문화도 모른체 살아왔다고 합니다. 성장과정 도중에 있었던 인종차별과 놀림에 심적인 고통은 많았다고 하며 대학을 졸업할 때 쯤에 음악을 하고 싶었으나 부모가 반대하여, 그때 크게 싸운 이후로 부모님과의 관계도 나빠졌다고 했습니다.
그 후 아저씨는 취직을 하고 어느 정도 승진도 하고 뉴욕에서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생활여건을 손에 넣었다고 합니다. 돈도 있었고, 연애도 하고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 다투는 날이 많아지며 결혼도 무산되었되요. 미국인이고 미국인과 같은 가치관이지만 육체는 동양인. 아저씨는 거울을 볼때마다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마음속에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 고독한 감정이 넘쳐왔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의 인생은 어찌됐건 태어나는 곳부터 시작하지만, 아저씨의 인생은 버림받아 입양된 미국부터 시작된다는 그런 쓸쓸함과 마치 내용물과 그릇이 일치 하지 않는 이질감을 거울을 볼때마다 느끼며 결국 죽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10대인 저는 곰곰히 생각하다 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했죠.
But I think you are lucky sir.!
(하지만 저는 아저씨가 운이 좋다생각해요)
풍요로운 양부모 곁에서 돈과 교육 걱정 없이 잘 살고, 지금도 뉴욕에서 좋은 직장에 다닌다니,
섬에서 나갈 수 없는 청소년 입장에서는 정말 운 좋은 이야기일수 밖에 없다만, 그런 이야기가 아니였어요.
At least you knew why you were treated differently. You knew why you were hated.
(적어도 아저씨는 왜 차별 받고 살아야 했는지 알고 계셨잔아요. 왜 미움받는지도 알고 계셨잔아요.)
쳇팅으로 느껴지는 아저씨의 회신은 다소 당황해하는 것 같았어요.
청소년은 어느 아이의 이야기를 했죠.
그 아이는 일본에서 태어나 3살때 아빠의 고향인 대한미국에 왔대요.
그 당시의 한국은 아직 문화개방의 도중에 있어 일본음악을 공공장소에서 틀으면 공안의 주의를 받던 시대였대요. 우리에게 친숙한 일본 에니메이션도 J-pop도 처음으로 한국에 찾아와. 일본에 대한 흥미와 반일감정이 섞이는 복잡한 시대. 아이의 아빠는 회사 때문에 바빴고, 그 아이는 한국어를 모르는 엄마와 다니며, 자연스럽게 일어와 한국어를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학교 아이들이 그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한국어를 못하는 엄마, 엄마와 일본말을 쓰는 이상한 아이. 놀림감이 되기에 시간은 걸리지 않았지요.
[ 일본놈! 일본놈! 니내 나라로 돌아가라! ]
엄마와 있을때는 별일 없었으나, 혼자다니면 돌을 던지는 아이, 욕을 하는 아이, 문방구에서는 뽑기를 할때면 몇등을 뽑아도 제일 작은 엿을 주었대요. 학교에선 선생님까지도 화장실을 못쓰게 하여 냄세나는 속옷을 입고 집에가는 날도 무척 많았대요.
초등학교 3학때, 처음으로 친구가 생기고, 친구와의 하교길에 마음이 들떳있던 날.
학교 정문에 고학년 형들이 몽둥이를 들고 아이의 길을 막았다고 합니다.
[일본놈을 쫏아내자! 쫏아내자!]
아이는 새롭게 생긴 친구가 있어 두렵지 않았대요.
두렵지 않다고 친구가 생겼다고 당당하게 저리 가라고 외쳤지요.
대장같은 형은 이렇게 말했어요.
[너 그 일본놈이랑 친구할래? 아니면 우리랑 친구할래?]
그러면서 몽둥이 하나를 던져주었고, 아이가 처음으로 친구라 부른 아이는 몽둥이를 들고 그 아이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결국 그날도 아이는 열심히 뛰었습니다. 웃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뛰고, 돌이 날라올까봐 더 뛰고. 한번이라도 더 덜 맏아 보려고 열심히 뛰었죠.
Why? Aren't they same Korean kids? Speaking Korean language?
아니 왜지? 같은 한국 아이들이 아닌가? 똑같이 한국말로 대화도하고
단어 하나하나가 심각하고 무거웠던 아저씨의 타자가 빨라지며 아저씨의 호기심이 화면 넘어 느꼈질 정도 였어요.
역사문제? 한일관계? 정치? 아쩌씨에게 드릴 답변은 정말 단순했습니다.
I don't know. Things just happens...
저도 모르죠. 그저 그렇게 되었어요...
아저씨는 그 아이가 어떡해 되었느지 물어봤습니다.
그 아이는 그후 인구 5만명정도의 작은 섬에 이민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 일본 아이들이 있어, 오사카 출신인 엄마와 함께 일본인 가족의 아이들과 어울려 다녔습니다. 한국어를 모르는 엄마 덕에 그 아이는 일본어도 능통하여 어울려 다니는데 어렵지 않았지요.
어렵지 않게 보였지요.
일본아이들은 어른들 앞에서는 상냥하고 친했지만, 어른이 없는 곳에서는 아이를 괴렵혔어요. 격투기를 배우는 아이의 샌드백이 되었고, 항상 놀림과 불리함 속에서도 그런게 친구라고 아이는 생각하고 지냈습니다. 집에 가기 전에는 일본아이가 항상 살을 꼬집으며 아무리 일본어를 해도 너놈 살 속엔 한국인피가 흐른다는걸 잊지말라 했습니다.
아저씨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지고, 저는 물어봤지요.
Are you there?
(거기 계시나요?)
I don't know what to say.....So, what happen to him?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그 아이는 어떡해 되었니? )
You are talking with him now.
(그 아이랑 이야기하고 있잔아요)
그리고 아저씨에게 말했다.
Some things just happens. Unfortunately you don't know when you are gonna know why.
그냥 별일들이 다 생기고, 그 일이 왜 생겼는지 언제가 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인가바요.
아저씨에게도 말했지만,
나는 내가 왜 그 어린나이에 괴롭힘을 당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진적은 없었어요. 일본놈이 아닌데 일본놈이라 하며 때리겠다는데 이해가 안가고. 엄마 따라 갔을 뿐인데 일본인 행세를하는 거짓말쟁이라 하며 때리겠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아프니까 피하고, 맞기 싫으니까 뛰고..... 누군가를 미워하기보단는 다소 신기하기까지 했지요. 하지만,
I just wanted one thing.
(그냥 바라는게 한가지 있었어요)
I just wanted a friend. Just one friend was okay.
(친구를 가지고 싶었어요. 딱 한명이라도 좋으니까, 친구를 가지고 싶었어요)
참고로 그후 얼마지나 그 아이는, 그러니까.... 저는 학교를 다니며 다국적 친구들을 만듭니다. 고등학교에서는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필리핀인, 현지인, 아주 많은 나라의 아이들과 한반이 되었고, 국적 관계 없이 우리는 모두 서로를 친형제처럼 의지하고 지켜주며 자랐습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이야기를 아저씨에게 했죠.
아저씨가 잠시동안 침묵하다 타자를 쳤습니다.
It's morning here.... I guess I couldn't end it last night.
여기는 아침이 되었어, 결국 어제밤 끝낼 수 없었구나
You are a great friend
(넌 참 좋은 친구구나)
그리고 쳇팅방을 나왔고. 그날부터 어느덧 30년 가까이가 지났내요.
그 후 아저씨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저씨가 살아 계신다면 70살을 넘지 않으셨을까.
살아계신다면 어떡해 지내시나 궁금하기도 하네요.
한 사람의 힘든 과거는 누군가와 비교 할 수 없겠지요.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큰 시련이며 고통의 기억일 수 있습니다.
감히 남이 말할 수 없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일 수 있겠죠.
작고 큰 고통을 떠나, 나는 또 다시 힘든 사람이 나에게 찾아온다면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없을때. 내가 누군가의 도움이 되고자 했고,
나에게 친구가 없을 때, 내가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 주려고 저는 생각한 것 같아요.
힘든일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며. 사연도, 이유도 나에게는 난 잘 모르겠지만, 해줄 수 있는 말은 있어요.
Can we be friends?
우리 친구할까요?
가장 원하는게 있을 때, 하나님이신지 신이신지 어느날 현관앞 택배로 놓여저 있거나 무한리필로 가져다 주시지는 않는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가장 원하는걸 가장 완벽한 형태로 찾아오도록 도와주신다고 하더라구요. 때론 그게 시련일수도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닷게 하려고 또는 찾아올 수 있도록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하지 않고 가다보면 기적 같은 일도 일어난다 하더라구요. 가장 원하시는게 무었인지 아시나요? 아저씨는 찾았을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살을 하려던 40대가 직전에 만난 어느 10대 청소년] 이라는 이야기 였습니다.
BGM: 촛불하나 By G.O.D
"왜 이렇게 사는게 힘들기만 한지 누가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한건지 태어났을때부터 삶이 내게준건 끝없이 이겨내야 했던 고난들뿐인걸 그럴때마다 나는 거울속에 나에게 물어봤지 뭘 잘못했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내게만이래 달라질것같지 않아 내일 또 모래"
"지치고 힘들땐 내게 기대 언제나 니곁에 서 있을께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내가 너의 손 잡아줄께"
가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