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진

by 임성규


오래된 흑백사진 하나가 아무리 찾아도 없다.


1968년 1월 한국은행 본관 건물 앞에서 찍은 신입행원 입행 기념 사진이다. 100여 명의 신입 행원들과 임원들이 함께 찍힌 사진인데 너무 오래되었고 사람은 많은데 얼굴 모습이 작게 나와 누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이 쉽지도 않은 사진이다. 그런데 그것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귀중한 입행 기념사진인데 칠칠맞게 그거 하나 잘 간직하지 못하고 잃어버렸다고 자책하며 가끔씩 아쉬워하는 사진이다.




1965년 대구에 있는 대구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을 했다. 대구 매일신문사의 향토장학금으로 시골에서 중학교는 겨우 마쳤으나 그 이상은 학교를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았다. 야간이면 낮에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학교는 다닐 수 있을 것이고 상업학교이니 졸업을 하면 대학은 못 가더라도 취직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뒤늦게 내린 결단이었다.


당시 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최고의 목표는 은행 취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도 쉽지는 않았다. 내가 다니는 그 학교는 그래도 알아준다는 명문 상업학교였지만 그 학교에서도 은행에 시험을 보려면 성적이 상위 20%(150명 정도) 이내에 들어야 했고 은행 중 제일 좋다는 한국은행은 상위 2% (15명) 이내는 되어야 했다.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죽자고 공부만 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3학년 가을 한국은행 입행 시험에 응시를 했다. 운 좋게도 합격을 했다. 미칠 듯이 기뻤다. 학교 게시판에 이름이 큼지막하게 붙었다. 은행 합격이면 게시판에 이름이 오르지만 특히 한국은행 합격은 맨 위에 눈에 띄게 주먹만 하게 이름을 올려주었다.


그런데 합격의 기쁨을 다 나누기도 전에 한국은행으로부터 합격 보류 통지가 왔다. 신체검사 결과 폐결핵이라 했다. 3개월 후에 재검사를 하여 최종 합격 여부를 결정 하겠다는게 아닌가!


눈앞이 캄캄했다. 취직을 못하면 나는 살 수가 없는데… 성적이 모자라 불합격이라면 다른 곳에 다시 시험을 볼 수도 있지만 폐결핵이라니…! 그때 폐결핵이라면 죽을 수도 있는 병이라 여겼고 폐결핵이면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받아주는 직장은 없었기에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재검사에는 꼭 통과해야 한다고 각오를 다졌다. 하이파스란 알약을 매일 한 줌씩이나 먹었고 스트렙토마이신이라는 아픈 근육주사를 계속 맞았다. 폐결핵에는 영양 보충이 제일이라 했는데 비싼 소고기는 계속 먹을 수가 없으니 변두리 시장에서 막 도살한 개고기를 사다가 소금물에 삶아먹었고 돼지비계 껍데기 같은 값싼 지방질을 꾸역꾸역 먹으며 폐결핵을 이기려 그야말로 사투를 벌였다.


1968년 1월 4일 대구 적십자병원에서 나 말고 또 한 사람, 같이 폐결핵이라고 한국은행 합격이 보류된 친구 L과 둘이서 폐 X-레이 재검사를 받았다. 친구 L은 좋아졌다 괜찮은 것도 같다고 했는데 나는 아니라고 했다.


그때 의사선생님을 붙잡고 울었다.

“나 여기 떨어지면 죽습니다. 살려주십시오…”라고.

갸웃거리는 의사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울부짖었다.


1월 10일 합격자 연수가 시작하는 날인데 9일 밤까지도 합격 소식이 오지 않았다.

떨어졌구나! 떨어진 것이라도 확인하려고 10일 아침 일찍 무조건 한국은행 대구지점으로 달려갔다.

“당장 지금 서울로 올라가라!”

라고 했다. 어제 본점 인사부에서 추가 합격 통지 전보가 두 장 왔는데 한 장이 배달되지 못하고 반송됐다는 것이다.


입행 원서에 적힌 주소에 응시자 앞으로 전보를 보냈으니 달동네 구석 셋방에 사는 나에게 그 전보가 배달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날 늦게서야 50여 명의 명문 대학 출신과 상업학교 출신 50여 명이 함께 연수를 받는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 건물에 도착했다. 한국은행 신입행원 연수실 맨 끝자리에 나 혼자만이 고등학교 교복과 운동화를 신은 채 지각 입실을 했다.


그 시절 양복과 구두는 반드시 맞춰야만 했고 맞춰도 며칠 후에나 찾을 수 있었기에 교복 운동화 차림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한국은행에 입행한 전무후무한 사람이 되었다.




며칠 전 한국은행 입행 동기 10여 명이 모였다. 모두들 한국은행을 떠난 지가 까마득하게 오래되었지만 입행 동기란 인연으로 가끔씩은 만난다. 다들 칠순이 지난 나이들이지만 한잔 술이면 똑같이 한국은행 시절 얘기로 목청을 돋운다.


대구 적십자 병원에서 폐결핵 재검사를 같이 받았던 L 친구가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핸드폰에 저장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입행 기념사진인데 거기서 자기를 한번 찾아보라 한다. 이 작은 사진에서 오래된 얼굴을 어떻게 알아보냐고 웃었더니 사진에 손가락을 대고 움직이며 확대해보라 한다. 몸에 맞지 않는 큰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지 않은 사람이 그 자신이라 한다. 추가 합격 통지를 늦게 받아 형님 양복을 입고 밤새워 서울 와서 입행 첫날 아침 일찍 찍은 사진이라 양복은 크고 넥타이가 없다 했다.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시려와서 지금까지 그 사진을 핸드폰에 보관하고 있다 했다.

아무리 손가락 움직여 그 사진을 확대하며 찾아봐도 거기에는 내 모습이 없다. 입행 첫날 아침 그 사진 찍었다면 나는 아예 거기에 있을 수가 없었다. 찍지도 못한 사진이니 내게는 없는 것도 당연한데 나는 그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알고 자책까지 하며 아쉬워했던 것이다.


'그래, 난 그때 입행기념식에는 참석도 못했었지!' 하는 생각이 났고 나 혼자만이 고등학교 교복을 입어 부끄럽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그때 연수실의 내 모습이 민망하게도 다시 떠올랐다.


동료들이 나누어 받은 사진을 본 기억이 입행기념사진이니 당연히 내게도 있었을 것으로 착각하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얼마나 애절하게 고대했던 입행이었으면 그런 착각을 다 했겠는가!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지난 세월의 한 모퉁이가 하얗게 이지러지면서 가슴 한 켠에 애잔한 바람이 불어왔다.


“괜찮아! 이제 있는 사진도 다 정리해야 할 나이인데 그 사진 없애 버린 것으로 생각하자. 입행기념사진 그 까짓게 뭐 대수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때의 안쓰럽던 내 모습이 아른거려 가슴 한 구석에 밀려온 그 애잔함은 쉽게 지워지지가 않는다.


마음속에 담겨진 흑백사진과 함께 그 아릿함은 진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