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미생 입성하다
종합상사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 커진 것 같다. 특히 취업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미생이라는 드라마로 인해 그 환상 아닌 환상도 더욱 커진 것 같다. 종합상사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야~ 상사맨"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 거 보니 예전의 "상사? 그게 뭐지?"라는 반응보다는 기분이 좋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종합상사를 가고자 하고, 가고픈 분들이 이 글을 읽고 조금이나마 그 업계가 어떠한 지 파악하기를 바라고자 하는 마음에 지금부터 철저히 개인 위주의 독백(?) 정도로 글을 쓰고자 한다.
미생.
난 종합상사를 퇴직하고 나서야 미생이라는 만화를 알게 되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신입사원 시절에 팀장님이 나와 내 동기에게 "너희들은 미생이니까 완생이 되려면 내가 고생을 좀 해야겠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 그 말을 듣고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도 몰랐고 미생이라는 단어 자체를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마음속으로 '미... 뭐라고?' 정도의 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생애 첫 직장 SC제일은행에 입행하고(은행 쪽 사람들은 입사라고 하지 않고 입행이라는 단어를 쓴다) 8개월이 지난 무렵, 내 삶은 피폐해져 갔다. 그 당시 퇴근하고 집에 오면 보통 9시 정도였고 종종 10시~11시까지 야근을 하곤 했다. 처음에는 사수였던 분이 매우 깐깐한 부지점장급 여자분이셨고 그분이 퇴근하는 걸 눈치 보다가 집에 가곤 했다. 그래도 은행 업무라는 것이 시계추 돌듯이 반복되는 일이어서 적응하는 기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고 총각이라는 이유로 지점 분들이 잘 챙겨주신 덕분에 근근이 버텨냈다. 하지만, 매일 오전마다 열리는 업무 회의에서 신용카드나 대출, 방카슈랑스 등의 영업상품을 판매하지 못한 직원에게 가해지는 지점장의 폭언은 사회에 첫 발을 내딘 28살짜리 어린 신입행원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고통이었다.
결국 퇴근 후의 나의 일상은 어느 기업이든 공채만 뜨면 죄다 관심 있게 지켜보고 원서를 접수하는 것이었다. MBC 기자시험, 국민일보 기자시험, 한국가스공사, 서울신용보증재단 등등 운 좋게 언론 쪽이나 공기업 쪽 서류가 모두 통과됐으나 번번이 필기에서는 한계가 올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안 했는데 뭔 필기시험 통과? 그러다가 문득 모 종합상사 신입 공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 회사에는 SC제일은행 준비를 같이 했었던 친한 동생이 다니고 있었고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일단 원서를 접수했고 1차 서류전형에 합격했다.
그 당시 은평구 뉴타운 집단대출 서류 접수를 한다는 핑계로 외근을 나가 1차 면접에 응시했고, 예비군 동원훈련 소집통지서를 빌미로 2차 면접에 응시하여 결국 최종 합격했다. 별다른 준비를 한 것도 아니었고 상사가 대체 뭐 하는 곳인지도 몰랐지만 그저 이름 대면 남들이 다 아는 회사 명칭(정확히는 상호)에 속하는 소속원이 되고 싶었다. 은행 업무 자체가 나에게는 매 시간이 지옥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난 결국 종합상사 법무팀의 신입사원이 되었다.
종합상사라는 곳은 생각보다 인원이 적었다. 1970~80년대 수출 호황기일 때는 1,000명~2,000명 정도의 인원이 있었다고 했지만 현재의 상사는 그 정도의 인원이 필요하진 않다고 한다. 1970~80년대 시절, 상사맨이 되면 출세가 보장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룹사 공채에서도 성적 우수자들만이 상사에 입사했다고 하니 그 영광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눈과 귀로 느껴진다. 어찌 됐든 인원에 비해서 회사가 그리는 밑그림과 사업 구상도는 그 스케일에 있어서 매우 크긴 했다.
일단, 상사맨에게 유리한 건 학벌이나 지식이 아니라 어학능력과 순간적인 판단이다. 수출거래만 국한해서 본다면, 아니 일반적인 철강영업으로 더 좁힌다면 일단 국내 업체와의 거래는 발로 뛰는 영업이 필요하다(물론 모든 해외영업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상사거래는 수출만 하는 건 아니다). 나와 같은 관리지원 부서 사람들은 좀 화나는 일이긴 했지만, 영업사원들이야 공급계약서 1장짜리 대충 써놓고 국내 메이저 철강 제조업체로부터 CR(냉연) 사다가 자기 고정거래선들에게 수출해서 팔아야 하니까 말 그대로 영업이 주(主)가 된다. 지사와 법인하고 이메일 주고받아야 하고 급하면 전화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 영어 못하면 어쩌겠나. 한국 사람들이 가끔 오해하는 게 눈 파랗기만 하면 영어 다 잘할 것이다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도 아니며 현지 출장 가서 임원이나 경영진 수행해야 하는데 러시아 담당이 러시아 가서 러시아말은커녕 영어도 제대로 못하면 어쩌겠는가?
두 번째, 상사에서 근무할 때는 몰랐지만 이직을 하고 난 후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은 개개인별 업무 책임 정도가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즉, 무슨 말이냐 하면 상사의 신입사원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에게 주어지는 업무 책임도는 일반 국내 대기업 제조회사의 대리 정도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아니 개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그 이상의 책임이 주어질 수 있다고 본다. 이건 즉, 좋게 말하면 본인의 업무 역량 범위가 넓어지고 그에 따라 업무 숙련도도 매우 커진다는 이야기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고 나면 본인 책임도 매우 커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니어급들에게 업무 책임이 주어진다는 건 굉장히 긍정적으로 받아야 들여야 할 점이다.
세 번째, 무역 거래라는 걸 알게 된다. 흔히 뉴스에서 무역 거래 이러면 무역하나 보다 생각하지 그게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일반인들은 전혀 모를 가능성이 크다. L/C, D/A, T/T, Bond, 입찰, 은행 Guarantee, B/L, 환어음 등등등. 처음에는 나도 뭐가 뭔지 전혀 몰랐지만 그냥 업무 하는 중에 배우면서 혼자 공부하고 부딪혔다. 어느 순간, 영업사원들보다 더 해박한 무역 거래지식이 내 머리 안에 들어가 있었을 때 업무 자체가 즐거움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국제무역사 자격증 정도 따두면 쉽게 적응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상사에서 하는 거래가 정형화된 거래보다는 비정형화된 얼토당토않은 거래 비중이 오히려 더 많을 때가 있다. 게다가 무역거래 특히나 상사 거래는 내 손에 물건이 없다. 돈 받으려면 한참 남았는데 B/L 먼저 받고 물건 가져가는 여신거래도 해야 되고, 제조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중국에서 물건 사다가 콜롬비아에 물건 팔아야 하는 삼국 간 거래도 해야 한다. 그 안에서 납기 조정 못하거나 중국 공급업체가 갑자기 사라지면 말 그대로 X 된다. 미생에서도 B/L 가지고 부서끼리 싸우는 에피소드도 나오던데 부서 간 싸움이야 상사에서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게 될 것이다. 이런 고위험 거래에서 어떻게 Risk를 줄여나가고 관련 부서하고 협의해서 매출액 늘리고 결국 영업이익으로 가지고 올 것이냐의 문제. 그리고 뜬금포로 날아오는 클레임에 어떻게 대응하냐 등등 잡다하지만 심오한(?) 업무들을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이 상사맨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