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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정리 정돈

버릴 것은 과감하게

by 나탈리


내가 인턴 약사로서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오클랜드로 이사한 후, 폭스바겐 메탈릭 실버의 매력적인 신형 비틀을 구매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약대를 졸업하고, 뚜벅이 생활을 청산하고 새 차를 갖게 된 이 순간이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한지, 차를 탈 때마다 느껴지는 기분 좋은 새 차의 향기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예쁘고 귀여운 디자인에 내 마음은 저절로 들뜨곤 했다. 그때의 나는 늦은 나이에 시작한 장시간의 공부로 굳어진 라운드 숄더가 저절로 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새로운 삶의 시작을 만끽하고 있었다


구글 이미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름다운 실버 비틀은 온갖 물건과 잡동사니로 가득 차버렸다. 처음에는 운동하러 갈 때 필요한 짐 가방, 운동복, 운동화, 그리고 샤워 용품과 슬리퍼 등이 자리 잡았다. 게다가 예민한 알레르기 피부를 가진 나로서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예비용 벌레 물림 방지 스프레이, 스테로이드 크림, 선블록 크림, 립밤, 클리넥스, 물통 등을 챙기다 보니, 차 안은 ‘Just in case’의 물건들로 넘쳐났다. 나중에 정리할 때 반이 넘는 물건들이 쓰레기로 변해버린 것을 보며, 나는 차의 사이즈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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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나는 새로운 차량으로 혼다 CRV SUV를 선택했다. 널찍한 실내와 여유로운 트렁크 덕분에 한동안 큰 만족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내 SUV는 트렁크, 조수석, 그리고 넓은 뒷좌석까지 온갖 짐으로 가득 차 있어, 그 원인이 차의 사이즈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나 올해 뉴질랜드의 겨울은 갈수록 춥게 느껴지는데, 두꺼운 패딩 점퍼와 목도리 등을 약국에 두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뒷좌석에 던져 놓고 가곤 했다. 뒷좌석 발판 공간은 혼자 쓰는 차량이라 새것인 채로 남아 있었지만, 짐 가방과 갈아 신을 운동화, 그리고 필요할지도 모를 상비약, 에코 쇼핑백 등이 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다.






유튜브에서 가끔 보는 정리 정돈과 미니멀리즘에 관한 영상은 나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여러 번 옷장, 신발, 취사도구들을 정리하며 쓸모 있는 것들은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버리기를 반복했지만, 내 정리 정돈은 아직도 갈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3일을 쉬어 보니, 팍팍하게 느껴졌던 오클랜드도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어느 정도 살 만한 곳으로 인식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느꼈던 불안감이 사라진 이 지난 삼일은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네이버 이미지



같은 오클랜드에 살면서도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얼굴을 보지 못했던 언니와 언니의 좋은 친구들과 맛있는 런치를 함께 나누었고, 매일 밤 8시에 끝나는 일상 속에서 잠시 들르는 짐이 아닌, 모처럼의 풀세트 운동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랩탑을 충전해 조용하고 고요한 집안에서 글을 써내려 가는 이 시간이 참으로 감사하게 느껴졌다.


먼저 언니와 함께 쏘이 라떼와 담소를 나누었다


언니의 지인분들과 함께한 맛난 런치



집안과 주위의 정리 정돈, 온갖 불필요한 옷가지들, 과거 그 언젠가 꽤나 큰 맘먹고 많은 비용을 지출하여 사놓은 물건들도 손이 가지 않은 채 먼지만 쌓여가는 것들을 보면서, 물건 정리와 함께 나의 인생에도 정리 정돈이 필요하다고 깨닫게 되었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값진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정작 나에게는 큰 도움도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되려 나에게 짐이 되는 것들은 무엇인가 또한 생각하게 되었다.






인생의 정리 정돈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쓸데없는 과한 친절과 상대의 무례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 채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참아버린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의 친절과 배려는 그것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해 왔다. 우리의 선의가 잘못된 상대에게 주어질 때, 그것은 당연함과 무례함으로 돌아오고, 그러한 무례함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나 자신을 감정적으로 나약한 존재로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다니…




한국 교민이 하는 소문난 카페서 언니와 라떼



우리의 친절과 배려는 그것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만 국한하기로 하는 것이 상대와 우리 자신에게 공정하며 건강한 관계의 초석이 된다는 것을 놓치고 살아왔다.




내일 다시 전쟁터 같은 사회로 복귀해야 한다. 양의 모습과 자세가 아닌, 최소한 훈련된 셰퍼드처럼,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보더콜리의 용기를 갖추고 싶다. 수십 년의 인생의 짐을 한 번에 정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하루에 조금씩 차와 집뿐만 아니라 나의 인생도 정리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모든 것이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었을 때, 나는 지금보다 더 여유롭고 단단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집근처 바닷가


그래서 오늘 나의 인생 정리 정돈의 일환으로 버려야 할 한 가지는 “쓸데없는 과한 친절”이다. 강아지처럼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을 지닌 나는, 오래전 일했던 퍼스트 클래스 승무원의 태도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로 인해 무임 승차한 승객에게도 과도한 친절을 베풀며, 정작 퍼스트 클래스의 요금을 지불했던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곤 했다. 무임 승차한 이들에게는 마치 그들이 그런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것 또한 나의 과한 친절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오늘부터는 나의 친절을 꼭 필요한 이들에게만 최선을 다하며, 진짜 소중한 사람들에게 진심과 정성을 쏟기로 다짐한다. 인생도 차와 집도 차근차근 정리 정돈함으로써, 생겨난 여유로운 공간은 소중한 추억과 자존감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더욱 단단한 나로 성장할 것이며, 나의 삶은 더 풍요롭고 의미 있게 변화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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