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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 Oct 12. 2024

단편소설, 오류(五柳)선생 표류기(3)

학교를 버린 아이

 시험 답안지 때문이었다. 정해진의 객관식 답안지는 스무 문제 모두 4번에 점이 찍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주관식 답란이었다. 주관식 답란은 뒷장 한 면에 전부 열 개의 답을 쓰도록 되어 있었는데 정해진은 그 뒷장을 온통 장문의 글로 도배해 놓고 있었다. 그는 답지를 천천히 읽어 내렸다. ‘…… 그의 컨디션에 따라 그가 끄는 슬리퍼 소리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다소 길게 느껴지는 날이면 그의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 날은 가르치는 날이 아니라 푸념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짧게 끊어지면서 날렵하게 들리는 날이면 더더구나 그의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 날은 가르치는 날이 아니라 빈정거리면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의 독선과 위선은 무엇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인가. 이곳에 내 이름자 찍힌 의자가 놓여 있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다.……’

 장황한 문구였다. 내용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선생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내 과목 시험이니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대상이 누구인지 냉큼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 따위 잡담을 답란에 늘어놓았다는 게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으론 서늘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것은 정해진의 정연하고 날카로운 문장력 때문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냥 덮어둘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시켜 정해진을 불러오도록 했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재차 아이들을 올려 보냈지만 소식이 없었다. 화가 치밀었다. 단걸음에 3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정해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무단결석이었다.

 교무실로 돌아와 함부로 던져 놓은 답안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검은색 볼펜으로 흘겨 쓴 글씨는 비교적 정갈했다.

 ‘…… 우리가 그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들이 요긴한 수단으로 쓰고 있는 관리와 통제는 학교라는 조직을 탈없이 유지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도 획일화와 서열화를 고집하고 있으며 근사한 포장지로 내부를 감추고 있다. 학교는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하고 학력이 더해 질수록 인간적 됨됨이가 흐려지는 심각한 역작용이 반복되고 있다.……’

 그는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자기를 의식했다. 불쾌함과 모욕감, 그러면서 뭔가 두려움 같은 것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분노와 놀라움일 수도 있었다. 문장 속에서 면도날 같은 차가움이 우러나와 맨살을 긋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읽기를 멈출 수 없었다.

 ‘……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학교 폭력이 어떻고 왕따가 어떻고 요란 떠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학교라는 거대한 조직체가 이미 폭력 그 자체가 되어버린 지금, 폭력은 폭력을 잉태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야자 마치고 개처럼 학원으로 끌려가는 우리의 친구들이 불쌍하다. 사교육을 방지한다고 방과후학교라는 제도를 만들어 낸 저능아들도 한심스럽다. 방과후학교에 참여한 후, 우리의 친구들은 더 늦은 시간까지 사교육 현장에 내팽개쳐 지고 있다. 이것이 선을 빙자한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교사들에게 방과후학교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 마다할 이유 없는 별도의 수입원이라고나 할까. 이런 상황에서 인간다운 사람을 키우는 교육이 가능한 일인가. 이미 이 땅의 수많은 교육자들에게 교육은 생계 유지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되었다. 그렇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학교라는 이 괴물 속에서 나는 기꺼이 아웃사이더로 남아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열여덟 살, 고등학교 2학년의 필치라고 보기에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문장의 흐름에 강약이 실려 있고 쇠갈고리 같은 날카로움이 현상의 본질을 헤집어 내고 있었다. 그는 정해진의 답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우선 정해진의 답지를 카피하기로 했다. 가슴 한쪽에서 까닭 모를 분노가 치밀었다. 나쁜 자식! 음흉한 놈! 모멸감 때문인지 명치끝에서부터 알싸한 기운이 목 언저리까지 올라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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