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얘길 듣던 나는 갑자기 속이 뒤틀렸다. 그의 억지, 그의 편애, 그의 무시, 그의 독설은 도를 넘은 지 오래였다. 늘 웃는 얼굴이었지만 표피 속의 내피는 아마 뱀 껍질 같을 거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날 오후 수업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제는 내가 시장엘 나갔었지. 고등어도 사고 뱅어포도 좀 사고 밑반찬 거리도 좀 사려고 오랜만에 재래시장엘 나갔었는데 말이야. 어물전 가운데를 지나는데 누가 아주 반갑게 인사하는 거야. 봤더니 이십 년 전에 졸업했던 제자였어. 공부도 참 지지리 못했던 놈이었는데 어디 가시느냐고 묻길래 고등어 사러 간다고 했지. 그랬더니 시장에서 생선가게를 연 지가 한 오 년 되었다는 거야. 그러면서 선생님 뵌 지도 오래되었는데 이왕 나오셨으니 드릴 건 없고 참 잘됐다고 통통한 걸로 무 넣고 지져 드시라고 고등어 몇 마릴 싸 주는 거야. 덕분에 먹기는 잘 먹었지. 그놈 그거 공부는 엉망이었어. 그러니 어물전에서 고등어나 팔고 있지. 너희도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제대로 된 밥줄 찾기 어려울 거다. 알았어?”
그분에게 배웠던 수학 공식은 모조리 잊어버렸는데 이 밥줄 이야기만은 방금 들은 것처럼 기억에 또렷했다.
졸업한 지 30년이 넘은 제자가 조심스럽게 들려준 이야기다. 그는 아직도 김 선생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밥줄이란 어떤 것일까요?”
선생이 제자에게 묻듯 제자가 내게 물었다. 그의 구릿빛 손등 위로 굵은 힘줄이 꿈틀거렸다.
2. 인연줄
조선 중기의 가사(歌辭) 중에 ‘규원가(閨怨歌)’라는 작품이 있다. 작자가 허난설헌이라는 설도 있고 허균의 첩 무옥이라는 설도 있다. 독수공방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여인네의 한과 설움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부생모육(父生母育) 신고(辛苦)하여 이내 몸 길러 낼 제
공후배필(公侯配匹)은 못 바라도 군자호구(君子好逑) 원하더니
삼생(三生)의 원업(怨業)이오 월하(月下)의 연분으로
장안유협(長安遊俠) 경박자(輕薄子)를 꿈같이 만나 이셔.....
고등학교 학생들이 이해하기엔 편한 내용이 아니었다. 한자 투성인데다 해석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 수업은 늘 백남봉의 원맨쇼 이상이었다. 어려운 내용을 쉽고 재밌게 전달하기 위해선 굴욕적인 표정이나 기발한 몸짓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수업 중에 느닷없이 하모니카를 불어 조는 아이를 깨우기도 했다.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휘파람을 불어 아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월하노인은 부부가 될 남녀의 발목을 붉은 실로 묶어서 인연을 맺게 해 준다는 전설 속의 노인네다. 자식을 점지하는 건 삼신할머니 역할이고.”
수업을 끝내고 복도를 지나가는데 김동욱이 싱글거리며 내게 물었다.
“선생님. 수업 정말 재밌어요. 그런데... 저 장가갈 때 선생님이 주례 서주실래요?”
장난기 어린 얼굴이었지만 귀여운 제안이었다.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하마.”
내가 주례 섰던 그 아이, 동욱이가 이혼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혼한 지 벌써 7년이 넘었다고 했다. 두 사람의 발목을 묶었던 인연 줄이 가늘었던 탓일까. 안타깝고 서운했다. 언뜻 김용임이 부른 ‘사랑의 밧줄’이란 노래가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