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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 Oct 07. 2024

터진 엉덩이

 그를 만나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3년이 흐른 뒤였다. 그는 우리 반에서 맡아 놓고 꼴찌 하던 인물이었다. 그의 검은 교복 소매 끝은 늘 풀을 들인 것처럼 빳빳했다. 흐르는 콧물을 연신 옷소매로 닦아냈기 때문이었다. 교복 바지는 아랫단이 터져서 너덜거렸고 엉덩이 부분은 ㄱ자로 찢어져 몇 겹씩 기워 입고 다녔다. 점심 도시락 반찬은 달랑 고추장 하나뿐이었다.

 그랬던 그가 그날 타고 온 차는 최고급 외제 승용차였다. 깃을 세운 진한 갈색 티셔츠에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는데 모처럼 고향 근처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맥주잔을 기울이며 호탕하게 웃고 있는 그의 이마가 유난히 번쩍거렸다. 그는 화제가 바뀔 때마다 '너는 학교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서 잘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했다. 정말 그랬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나자 화제는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 이야기로 돌아갔다. 

 "나는 가난이 싫었어. 어머니가 시장 일 끝내고 밤 늦게 방문 열고 들어오시면 비릿한 생선 냄새가 확하고 코를 찔렀지. 난 그게 싫었거든. 아마 가난에도 냄새가 있다면 꼭 생선 비린내 같을 거야. 한밤중에도 어머닌 내 양말이며 속옷, 바지를 꿰매셨어. 밀린 빨래, 설거지, 허드렛일 하시느라고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지. 우리 어머니만큼 매일매일 긴 하루를 보낸 사람은 없을 거야."

 술집에서 나온 우리는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상가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들로 거리는 대낮처럼 환했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났는지 우리 학교 아이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규철이었다. 언뜻 우리 옆을 지나치려던 규철이는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야윈 잔등에 짊어지고 있는 책가방이 몹시 무거워 보였다. 앞서서 멀찍이 걸어가는 규철이의 교복 엉덩이 부분이 거미줄 같은 재봉질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착실해 보이는구먼."

 "아무렴. 정말 착한 아이지."

 "옛날 나만큼이나 훌쭉하네그려."

 가로등 아래 모퉁이 쪽으로 걸어가는 규철이의 뒷모습을 그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한 달 후에, 그로부터 짤막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벌써 33년이 지났더군. 그동안 나는 그 시절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네. 그때 그 어려웠던 생활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나는 요즘에서야 느낄 수 있었네. 가난하고 힘들었던 그 시절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네. 내게 그 옛날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건 바로 그날 보았던 그 학생이었다네. 터진 엉덩이를 기워 입고 기운 없이 걸어가던 바로 그 학생 말일세.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그 학생이 공부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었으면 좋겠네. 열심히 가르쳐서 훌륭한 재목으로 길러 주시게."

봉투 속에는 편지글과 함께 100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이 들어 있었다.    

  

- 규철이는 미국 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2024년 현재 서울 소재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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