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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미숙 Nov 19. 2024

권사님과 미남 유공자

치매 속에서도 피어나는 짝사랑

꽃이 말해주는 이야기: 해바라기는 항상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그 존재만으로 밝은 에너지를 내뿜는 꽃입니다. 권사님 어르신의 일방적인 사랑은 마치 자신의 태양인 유공자 어르신을 향해 끊임없이 시선을 고정하는 해바라기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비록 유공자 어르신은 관심을 주지 않지만, 권사님 어르신에게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과 위안이 되는 모습이 해바라기의 순수하고 헌신적인 모습 같습니다.  



7.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아침 체조 시간. 모두 모셔놓고 매일 체조로 아침을 알린다. 


손을 올리면 내리시고, 내리면 올리시는 손과 발의 엇박자 속에서도 저마다 열심히 따라 하신다. 


건강 체조, 장수 체조 음악이 울리면 저마다 방에서 나오시고, 당신의 지정 자리에 임하시려 하지만, 여자 어르신 한 분은 휠체어로 이동하시며 꼭 한 남자 어르신 옆으로 찾아가신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당신의 짝꿍이시다. 부부는 아니다. 그럼에도 다정한 연인처럼, 처음에는 두 분이 서로 좋아하시는 줄 알았으나, 여자 어르신의 일방적인 과잉 친절이 넘친 짝사랑. 


두 분 다 약간씩 치매 증상이 있으시다. 남자 어르신은 전혀 관심이 없고 무반응인데 여자 어르신께서는 과거 남편을 섬기듯 하루 종일 남자 어르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시고 일거수일투족 관찰 대상이시다. 다른 것엔 관심 없으시고, 그저 우리 유공자 미남 어르신에게만 관심. 


여자 어르신께서는 과거 교회 권사님 직분을 갖고 계셨다. 남편 어르신은 뭐 하시냐 물으니, 남편이 '장위동교회' 목사님 활동을 하신다고 하셨다. 


처음엔 모두 믿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짓말임을 알았다. 당신이 상상하는 대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아주 천연덕스럽게 말씀하셔서 모두 속은 것이다. 


남편은 일찍 하늘나라에 가 계시고, 당신은 치매로 이곳에 오셨는데, 우리 미남 유공자 어르신에게 반해서 혼자만의 짝사랑하고 계신다.


유공자 어르신 왈, "너무 귀찮고 이상한 사람이다"며 무응대하신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권사님 어르신께서는 직진만 있다. 


간식이나 식사 시간에도 매번 당신 음식 절반을 꼭 미남 어르신께 덜어드리고, 그분이 드시는 것을 확인한 후에 당신도 드신다. 남자 어르신은 아무 감흥 없이 받아 드시기만 하시고, 방으로 쑥 들어가 버리신다.


우리 여자 어르신 방과는 대각선으로 먼 위치에 있지만, 권사님은 휠체어에 앉아 멀리 그 방만 쳐다보시고 있다. 미남 어르신께서는 아침부터 주무시기 전까지 아침저녁으로 밖에서 두 번 걷기 운동을 하시고, 이후로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셔서 그림 색칠에만 열중하시며 주로 방에 계신다.


"여자 어르신을 어떻게 생각하시냐?" 물으면, "난 우리 마누라 생각밖에 안 나고, 싫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어쩜 이렇듯 강경하신 분을, 눈길조차 안 주는 분을 여자 어르신은 심적으로 의지하듯 평안해하시고 밝게 지내신다. 


혼자 수시로 찬송을 부르시고 기도하시듯 중얼거리시며, 미남 어르신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행복이 가득함을 느낀다. 이런 마음을 누가 방해할 수 있겠나요…


"어르신, 그렇게 저 어르신이 좋으세요?" 여쭈면, "그럼"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가득 머금고 계신다. "이 연세에도 감정은 살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쁜 우리 권사님, 하늘에 계신 남편을 너무 사랑하셨나 보다… 너무 그리우신가 봅니다. 유공자 미남 어르신을 남편으로 착각하시고, 바라만 봐도 설레게 하는 옛날 당신 낭군님 대하듯 대신 위로를 받고 계시는 것 같다. 


밤에도 잠깐씩 미남 유공자 어르신 방을 들여다보며 잘 주무시는지 확인하고 돌아가 잠자리에 드신다.


우리 국가 유공자 어르신께서는 유공자 조끼에 그동안 받았던 공로 메달을 주렁주렁 달고, 모자와 옷 세트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시고 자랑하신다. 


걷기 운동 나가실 때나 외출하실 때 꼭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챙겨 입으시며, 자부심이 아주 크게 대단한 상징으로 여기신다. 그런 어르신께서는 날로 행동과 기억에 오락가락 변화가 생기신다.


하루는 오락 시간이라 모두 다시 모이셨는데, 돌아가며 한 곡조씩 부르시라 마이크를 넘기고, 저마다 흥이 오른 노래자랑에 임하셨다. 그런데 우리 권사님 어르신 차례가 되었을 때,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어 설렁해졌다. 


"내 주를 가까이하려 함은~" 찬송가를 부르시는데, 이를 어쩌누. 모두 흥이 깨지고 한 분씩 방으로 이동하시려 한다. 그러나 우리 권사님은 굳건히 완곡을 마치고 한 곡 더 신청.


"나의 사랑하는 책, 이 책 중에 있으니~" 모두 들어가 버린 썰렁한 빈 홀에 홀로 열심히 찬송가에 빠지고 있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이렇게 김 빠진 맥주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끝나버린 오락 시간.


남자 어르신은 이 시간도 싫어하셔서 나오지 않으셨다. 오직 그림 색칠만이 하루 숙제를 끝내려 하듯, 10장이 넘도록 잠이 오실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으신다. 차츰 그림 양을 줄여 운동하시는 쪽으로 유도하기도 한다. 


이렇듯 여자도 노래도 관심 없는 유공자님 옆에서 혼자 너무 좋아하시는 권사님. 하루는 늘 밝고 해맑게 지내셔서 정신 건강에 좋아 보여 극구 말리지 않고 지켜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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