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들은 순간부터 눈물이 나려 했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가족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가족이란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라 가볍게 묻고 대답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기도 하다. 가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정확하게는 그저 마주하기 겁이 나서 회피하고 있었다는 것을 A와의 대화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가족이란 응당 서로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에 그만큼 많은 상처를 주기도 한다. 특히 어렸을 적 부모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난 스스로 내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 계발 등등 열심히 살려고 매번 노력하며 바쁘게 살아간다. 하지만 나의 내면상태를 돌본적이 없다. 그저 매일 감사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책의 독려에 따라 열심히 감사, 긍정을 세뇌할 뿐이었다. 나 스스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고 상처를 쉽게 받았다. 그리고 ‘나’를 표현하는 데 있어 어렸을 적 주 양육자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엄마는 3년 전쯤, 암으로 돌아가셨고, 아빠는 지금 알코올중독으로 치매가 와서 요양원에 있어요”
나는 현재 상태를 먼저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수많은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전 아빠를 증오해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엄마가 암 진단을 받고 돌아가시는 그 과정 속에서 제가 한 일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려요.”
수많은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렸을 적 가족을 방치했던 아빠, 쇼핑중독으로 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들이 나뒹굴었다. 같은 물건을 10개씩 사는 것은 기본이었다. 아빠랑은 식사 한번 같이 한 적도 없으며 여행도 가본 적이 없다. 아빠는 무능했고 개인택시를 하며 번 돈을 한 번도 엄마에게 가져다주지 않았다. 집은 매일매일이 부부싸움 전쟁터였으며 엄마는 매일같이 나에게 한탄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도 같은 지붕아래 살며 이혼하지 않는 엄마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일찌감치 아빠를 포기하였으며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렇지 않으면 나 또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외동딸로서 엄마의 고통을 그대로 받아내었다. 집에서 행복하지 않았기에 고등학교부터 기숙학교가 있는 곳으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엄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0살이 되어서야 겨우 독립하여 집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가정에서 벗어나 사회라는 곳으로 뛰어들어 안정감을 찾아가는 듯하였다.
그리고 4-5년 전 엄마가 암진단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아빠는 없었다. 수술할 병원을 찾아다니고 요양병원 입원, 항암, 상태가 악화되어 가며 응급실을 가는 경우가 잦았고 마지막에는 호스피스병원 입원, 장례의 모든 과정까지. 엄마가 점점 몸이 약해져 가며 하나하나 인간의 기능을 잃어가며 복수가 차고 잘 먹지도 못하던 그 모든 순간에 아빠는 없었다. 엄마가 처음 암진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아빠에게 했을 때도 그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차라리 아빠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외동딸에 결혼도 하지 않는 30대 초중반의 나는 그 과정을 혼자 외롭게 치뤄나가야 했다. 남자친구 같은 것도 없었다. 아빠에 대한 증오는 무의식 속에 남자에 대한 거부감을 심어주었는지 나는 남자친구의 부족한 점들, 흠이 보이면 마음이 차갑게 식으며 이별을 선고하는 것을 반복했다. 장기연애를 해본 적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홀로 남겨진 아빠는 자기 자신조차 돌보지 못한 채 알코올중독으로 알콜성치매가 왔다. 심한 당뇨와 간병변으로 발가락이 썩어가고 있었고 발가락 상처치료와 요양병원입원, 그리고 결국 요양원 입소하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나는 또 묵묵히 헤쳐나갔다. 술, 담배 중독에 망나니처럼 살았던 아빠는 지금도 요양원에서 몸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혼자 살 때보다 편안히 주는 밥 먹어가며,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으니 옛날보다 더 건강해졌다.
그렇게 한 30분쯤 나의 일방적인 이야기를 들어주던 A는 나지막하게 말해주었다.
“엄마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엄마의 선택을 존중해 주세요.”
나는 비로소 사람들이 왜 상담을 받는지 깨달았다.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 내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 마음속에 감춰두었던 죄책감에서 해방되었다.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차마 할 수 없던 이야기를 필터링 없이 쏟아내고 나의 감정을 인정받고 나니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가족에 대해 먼저 물어보고 이야기까지 인내심 있게 들어준 사람은 전문상담가는 아니었다. 결론적으로는 나에게 영업을 위해 접근한 사람이었다. 회당 8만 원에 상담을 본인에게 3개월 받으라는 둥 6개월을 받으라는 둥 종국에는 그쪽으로 이야기가 세어버렸지만. 이미 나는 치유된 기분이었고 굳이 전문가도 아닌 사람에게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5만 원이었다면 생각해 보겠지만 8만 원은 너무 하지 않은가. 흥정을 시도해 보았지만 소용없기에 방향을 틀었다. 지속적은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았다.
나라에서 하는 바우처 사업, 청년 사업등으로 보조금을 받아 저렴하게 상담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회사에서도 마음건강센터가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무료로 해주는데 이번기회에 한번 받아봐야겠다는 마음에 상담신청서를 작성했다.
영업 목적이든 어떤 것이든 나를 상담이라는 여정으로 이끌어주신 영업맨에게 감사드린다. 덕분에 내 마음속에 응어리를 풀 수 있었고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할 용기를 갖게 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는 줄곧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암으로 가족을 떠나보낸 이 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했다면 지금쯤 엄마는 살아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지금 해봤자 전혀 소용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 생각이 잊을만하면 내 머릿속을 괴롭혔다. 잊을만하면 엄마 꿈을 꾸었고 잠이 깰 때마다 괴로웠다. 하지만 영업맨과의 상담받고 돌아온 날 밤 자기 위해 누웠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엄마는 괜찮아. 지금 너무 행복해. OO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제 그만 벗어나렴'
너무 보고 싶은 엄마. 정말 꺼내고 싶지 않던 이야기를 꺼내고 이렇게 글로 쓰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국가/지자체 정책으로 상담 비용지원받는 방법>
1. 서울시 청년 마음건강 지원사업
매년 분기마다 모집하는 것 같다. 만 39세 이하 서울시 청년이면 다른 조건 없이 신청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