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할까? 말아야 할까?
대학 때, 중앙도서관에서 시험공부하겠다고 다같이 들어앉아, 화장실에서 얼굴까지 씻고 나와서 편한 모습으로 모인 적이 있다. 그 때 동기 하나가 눈 옆에 시퍼런 멍이 서려 너무 놀래서 어떡하다 그렇게 됐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가 자기 남자친구 차 타고 어디 가다가 급정지를 하는 바람에 부딪혀서 생긴 멍이라고 했다.
근데 정말 그랬다면 광대뼈 주위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야하는데 이 친구는 눈 밑에 야들한 살에 멍이 들어 있었다.
"야, 바른대로 대. 남자친구가 때렸지?"
그랬더니 그 친구는 너무나 화들짝 놀라서 다른 핑계거리 둘러댈 틈도 없이 나에게 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군복무중 휴가 받아 나와서 만났을 때 여관으로 데리고 들어가려는거 안 들어가겠다고 몸부림치다 한 대 맞았다고 했다.
굳이 그 뒤에 어떻게 됐냐고는 묻지 않았는데, 그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자꾸만 콜렉트 콜로 부대인지 어디인지에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눈치였고, 그 친구는 휴대폰을 붙잡고는 절절매며 콧소리를 내고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이렇게 여자한테 손찌검 하는 놈은 안된다고 하며, 헤어질 마음이 있으면 당장 단호하게 말을 해야지 그렇게 흐지부지 우유부단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지 말라고 다그쳤다. 그리고 정 안되면 내가 통화라도 해줄테니 바꾸라고까지 하며, 그 친구에게 '폭행죄로 경찰에 신고 당하기 싫으면 당장 그만 전화하라'고 말 할 수 있을 때가지 옆에서 도와주며 단호하게 친구를 보호하려 했던 20대의 오지라퍼가 나였다.
아, 벌써 20년이 흘러 이제 나는 40대.
주변에 친한 동생들이 하나 둘 씩 결혼을 하는 나이가 되어서 결혼 할 상대를 소개시켜주곤 한다. 그리고 '언니가 꼭 한 번 봐줘요'라며 마치 나의 의견이 그들의 향후 결혼 결정에 퍽이나 큰 영향이라도 미칠것 처럼 부탁들 한다.
그치만 그 말 뒤에는 나의 사람 보는 눈에 대한 믿음 때문에 봐달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닌 것 같은 사람일 때에는 강력하게 도시락 싸서 말려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물어오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아닌 걸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 그거 바로 나니까 말이다.
근데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너무나 아끼는 동생이 결혼을 할 것이라고 갑작스레 몇 번 만나 본 것도 같지 않은 사람을 데려온 적이 있다. 이거는 나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주위의 사람들도 '야, 얘는 진짜 아닌데' 하며 고개를 저었다. 결혼하겠다는 마음이 있는 그 동생이 이 사람이 너무 좋아 죽겠어서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씌인 경우라면 또 모르겠는데, 정작 본인도 그저 1) 혼기가 차서 2) 상대가 직장이 비전이 있어서 3) 자기 말을 잘 따라주는 것 처럼 온순해 보여서... 정도의 결정적이지 못한 이유들을 나열하며 결혼을 해야겠다고 했다.
결혼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자 꿈이었던 나의 고등학교 동창은 결혼한다고 했을 때는 정말 입이 귀에 걸려서 쟤 안면 마비 오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좋~다고 셀셀 됐었다. 다른 고등학교 동창까지 합세를 해서 우리는 그 친구에게 너무 서둘러 결혼말고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보다가 하라는 조언을 했지만, 정말 이 사람 아니면 안된다며 너~무 좋아하길래 결국 우리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었다. 그런 겨우라면 오케이!
그치만 이 경우는 달라도 너무 달랐고,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산으로 가는 것 같은 결론을 내리는 이 동생을 보면서 우회적으로 말릴려는 시도를 몇 번 한 적이 있다.
남의 인생을 가지고 내가 감 나와라 배 나와라 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왕년에 나는 '도시락 싸서 말려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그것이 퍽이나 좋은 인간상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나로써는 요새 자아분열이 일어나는 것 같은 경험 중이다.
내가 말려서 결혼을 안 하게 됐다 치더라도, 그러면 그 이후 그 동생의 인생을 내가 책임져 줄 것도 아니고, 본인이 이 시기가 맞는 시기라 생각하여 그런 중대사를 치르겠다는데 그 책임과 결과도 결국에는 당사자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니다.
그리고 또 커플만의 관계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지난 20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며 깨닫기도 했거니와, 괜한 말을 했다가 이 동생과의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그리고 그렇게 멀어지기에는 사이가 너무 소중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둘이 결혼해서 잘 살기를 빌어주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여전히 찜찜하고, 내가 아는 동생이 너무 큰 희생을 하는 것 같고, 너무 혼자서만 하드케리 하고 무쇠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 같아 마음이 개운치는 않다.
'도시락 싸서 말려줄게'
실행으로 밀어부쳤던 의리와 패기로 넘쳐났던 나의 20대가 그립다.
이제는 이런 말에 실행력이 없어지고 그저 공수표만 던진 격이 된 나의 나이에 한탄을 해야하는 것인지, 관록이 붙어 현명해진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