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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Gardner Aug 19. 2024

때렸지만 좋은 부모님?

나와 남편이 매일 싸우고, 미국 적응에 지치고, 막 첫 아이를 낳아 허둥지둥하던 그 시절부터 내 멘탈을 잡아주고 내게 신용, 의료 등 미국살이 모든 걸 첫걸음부터 가르치신 시부모님과 나의 관계는 아주 돈독하다.


어쩌면 이 집 삼 남매보다도 내가 더 가깝다. 자식들이 뭔가 서운하게 하면 시엄마가 울며 전화하는 사람은 나다.


지난 10년간 남편은 시부모님께 참 못되게 굴었다. 


집이 고작 7분 거리인데 좀 도와달라 불러도 가지 않고,

시아빠가 수술을 해 잔디를 깎지 못하니 가서 좀 해줘 열 번쯤 말해야 억지로 가고,

가족 모임에선 늘 다른 방에서 혼자 자 버리고, 조금이라도 불편한 말을 들으면 홱 자리를 떴다.


나는 그래서 종종 남편 흉을 봤다.


아 좀 왜 저러는지 몰라, 좀 해 주지. 좀 앉아 있지.

도움을 요청하는 시부모님 앞에서 민망함은 늘 나의 몫.

남편이 피곤해서 그렇다며 변명을 대신하고, 마음이 상한 시엄마를 토닥토닥했다.




결혼 10년 차가 넘어가면서 나는 남편에 대해 몰랐던 많은 걸 알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나에겐 세상 천사 같은 시부모님이지만

20년 전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편은 청소년기 시절 부모님과 있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를 털어놓았고,

허리띠, 경찰, 코피 같은 단어들이 섞여 있는 그 이야기들은

지금의 시부모님을 생각하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남편이 화가 나도 아이들에게 절대 매를 들지 않는다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죽어라고 도와주기 싫은 거였구나.

그래서 조금만 부정적인 말을 들어도 자리를 떠 버렸구나.

그런 트라우마가 있는 당신에게 나는 불효자 프레임을 씌운 거였구나.


10년이나 말을 안 해줬으니 나는 알 수가 없었지만

모른다고 그게 정당화될 순 없다.


섣부르고 철없던 내 편협한 판단과 언행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사람은 많은 경험과 감정이 투영되어 때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로 비치기 마련이다.


연로한 부모님이 수술을 받았는데

도움을 주긴커녕 툭하면 화를 냈던 '못된 아들'은,

사실은 20년 전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아픈 사람'이기도,


과거 그런 부모님과의 불화가 있었음에도

미국 땅을 처음 밟아 도움이 필요한 와이프를 위해

껄끄러움을 감수하고 다시 부모님과 함께 한 집 생활을 결심했던

'좋은 남편'이기도 하다.


지나친 훈육으로 아들에게 상처를 줬던 시부모님은

아들의 외국인 아내를 사랑으로 감싸주고 헌신을 베풀어 준

감사받는 게 마땅한 분들이기도 하다.


남편과 시부모님 간 그런 과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도

그분들이 남편과 나를 많은 부분에서 도와주셨다는 사실이 없던 일이 되진 않고,

그러니 고마운 분들인 것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내가 감사하다는 이유로 남편의 등을 억지로 떠밀지 않는다.



난 내 감사를 남편에게 대신 표현하라고 밀어 넣어 온 격이었다.


마음 한 곳이 부러져 아직까지 붙지 않은 사람에게

네 마음이 부러진 곳으로 달려가 활짝 웃고 오라고.


모든 감정은 각각 그대로 존중받아 마땅하고,

부모이고 배우자일지라도 감정을 강요할 수는 없다.


감사한 일은 오롯이 감사로 표현하고

상처는 상처대로 따로 떼어내서 치유해야지,


내 감사를 앞세워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다 지난 일이니 상처는 그만하면 잊으라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감사의 무게와 상처의 무게는 현저히 다르고,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편 마음의 안녕이다.


10년 전에 비하면 남편이 시부모님을 대하는 태도는 많이 유해졌다.


그래도 나는 남편이 먼저 나서서 하겠다 말하지 않는 이상

왜 안 해, 빨리 가서 해, 강권하는 것을 그만뒀다.


시부모님께 도와달란 전화가 와도

남편이 해 주지 않아도 더 이상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엄마, 남편은 안 될 거 같은데. 제가 해 드릴 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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