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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영 Oct 27. 2024

천사의 얼굴

옆으로 누워있다가 오른팔을 뒤로 뻗자 손에 딱딱한 물체가 닿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건 곧이어 핸드폰 알람 소리가 뒤통수에서 울리면서였다. 한숨을 내쉬며 알람을 껐다.     


또 꿈을 꿨다. 며칠째 이어지는 꿈이었다. 첫날에는 꿈을 꾼 것도 모른 채 평소처럼 잠에서 깨어났지만, 아침 내내 몽롱한 상태로 1교시부터 넋을 놓고 있다가 수학 선생님께 한 소리를 들었다. 어제는 커다랗고 노란 뒷모습을 보았다. 흩어진 구름 위를 날아가는 노란 뒷모습.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어제도 본 그것이었다. ‘저게 뭘까, 사람인가’ 생각하는 순간 그 노란 뒷모습은 손 쓸 틈도 없이 훨훨 날아가 버렸다. 오늘은 뭘 봤더라. 아, 그것을 따라갔었다. 신기한 것은 내가 그 노란 뒷모습의 천사(그냥 하늘에서 떠다니니까 천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처럼 구름 위를 떠다녔다는 것이다. 다만 나는 천사처럼 구름 위를 유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쉽게 중심을 잡을 수가 없어 개구리헤엄을 치듯 팔다리로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허우적댔다. 내가 땀까지 뻘뻘 흘리며 천사를 따라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천사는 어제처럼 날아가 버리지 않고 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떠 있었다.     


‘저기요.’     


하지만 내가 목소리를 낸 순간, 천사는 뭐가 그렇게 급한지 또 저 멀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     


“요즘 매일 꿈을 꿔.”     


등교하자마자 2반의 연주를 찾았다. 연주는 해몽, 관상, 사주풀이에 능했으며 이미 5천 명 정도의 팔로워를 보유한 타로카드 인플루언서였다. 연주는 교실 뒤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매만지다 내 얘기에 눈을 반짝 빛내며 다가왔다.     


“프로이트가 말하길 꿈은 무의식적인 욕망의 반영이랬어. 너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욕구가 뭐야?”


“글쎄. 잘 모르겠는데.”


“너조차 모르는 잠재된 내면의 욕망일 수 있어. 그리고 자꾸 날아간다며. 정말 깊이 욕망하는 대상인데, 쉽게 얻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지.”     


나조차 모르는 잠재된 내면의 욕망인데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나의 하루를 되짚어 보았다. 삼분의 일 정도는 잠을 자고 삼분의 일 정도는 학교에서 보낸다. 학교에 있는 시간 중 꽤 많은 부분은 내 자리에서 대각선으로 오른쪽 앞에 앉은 반장의 왼쪽 얼굴을 바라보며 보내고 있다. 반장과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저 비스듬한 뒤쪽에서 나지막한 선생님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반장의 새까맣고 짙은 눈썹과 깡마른 어깨를 바라보는 게 최근의 쏠쏠한 즐거움이었다. 반장이 내 욕망의 대상일 수도 있나?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니면 내가 요즘 가장 원하는 것. 아이슬란드에 가서 오로라를 보는 것. 물론 갈 여건은 안 되기에 언젠가 가고 싶은 바람일 뿐이지만 이미 핸드폰 사진첩엔 색색의 오로라 사진이 가득했다. 밤이 가장 길고 어두울 때, 지구의 대기권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다는 핑크빛, 초록빛, 파란빛의 황홀한 빛의 춤. 오로라에 대해 처음 알게 된 날부터 언젠가는 보러 갈 수 있길 희망하고 있었다.     


아니면 북카페! 아파트 단지에 있는 북카페에서 항상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들리는 커피 머신의 진동음, 유리컵에 경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커다란 구 모양의 얼음 두 개, 그리고 고소한 커피 냄새. 북카페의 주인은 열아홉 살로도, 서른다섯 살로도 보이는, 긴 머리와 수염에 가려져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로 모든 계절 모든 시간을 항상 카운터 뒤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도 나만이 그 흐름을 알 수 있게, 꾸준하고 조용하게. 한 번도 주인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거의 매일 방문하는 나를 그가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가 언제든 떠나고 싶어지면 나에게 북카페를 물려주려고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나 졸업하면 대학 안 가고 요 앞에 북카페에서 일하면 안 돼?’     


어느 날 식사 자리에서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는 내가 아주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한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대학 안 가면 뭐 해 먹고 살게.’     


북카페 하고 싶다니까, 뒷말은 혼자 삼켰다. 엄마가 주목한 것은 북카페가 아니라 대학이었다.     


그다음은 또 뭐가 있을까. 더 생각하기 전에 수업이 끝났다. 대각선 앞쪽에 앉은 반장이 어깨에 까만색 가방을 둘러메는 것을 보며 나도 가방을 싸고 교실을 나섰다.     


-     


바람이 귓가를 간질였다. 향긋한 귤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또 꿈 속이었다. 10미터 정도 앞에 노란 옷의 천사가 구름 위로 경쾌한 스텝을 밟고 있었다. 나도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 아직 중심을 잡는 것은 어려웠지만 어제보단 몸이 좀 가벼웠다. 왠지 천사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제 천사를 괜히 불렀다가 날아가 버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을 떼어 천사를 향해 다가갔다. 나는 또 땀이 뻘뻘 나기 시작했지만, 천사는 힘을 들이지도 않고도 우아하게 구름 위를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바짝 약이 올랐다. 힘에 부쳐 잠시 쉬다 고개를 들자, 천사가 구름 위에 걸터앉아 있는 게 보였다. 오늘은 기필코 천사의 얼굴을 확인하리라. 숨을 크게 몰아쉬고 내 몸의 모든 힘을 쥐어짜 천사가 앉아 있는 곳까지 내달렸다. 팔다리가 자꾸 구름 사이로 꺼지고,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내 18년 인생에 이토록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던 적은 없었다. 어쩐 일인지 천사는 어제처럼 달아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마침내 천사의 뒷모습 바로 뒤에 섰다. 천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잠시 숨을 고르고 천사의 왼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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