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기차역 플랫폼 위에 엄마와 어린 딸이 나란히 새벽 첫 기차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옆에 놓인 쌀자루 포대에는 묵직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고, 딸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우리 아빠...“
딸은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 아빠가 죽었다. 깨어난 딸을 아빠는 달래주었고, 무릎에 안아주었다.
그런데 꿈보다도 지금 아빠의 무릎 위에 있는 것이 더 무섭다.
익숙하지 않은 아빠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권위적인 아버지에 대한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이다. 남아선호사상으로 남동생들은 태권도 학원,
주산 학원, 컴퓨터 학원에 다녔지만, 나는 보내주지 않으셨다. 보이지 않은 차별을 받았는데,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자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5년 동안 메고 다닌 낡은 빨간색 책가방을 친구들이 놀리자, 어머니는 새 가방을 사주신다고 하셨다. 일 년 후면 중학교에 가기 때문에, 동생에게 물려줄 생각으로 남아용 가방을 골랐고, 일 년 동안 그 가방을 메고 다녔다.
그래도 나는 창피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양보하는 딸이었다. 그런데 동생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그 시절
유행하는 새 가방을 메고 다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어버이날 부모님께 드릴 카네이션을 만들고 진심 어린 감사 편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보지 않고 그냥 나가셨던 기억이 두고두고 서운한 마음으로 남았다.
밥상머리 교육은 식사할 때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공부하지 않으면 전기불도 켜지 말라 하셔서, 나는 컴컴한 곳에서 TV 보는 게 익숙했다. 모든 서운함이 미움으로 남아,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린 적도 있었다. 엄마와 싸우실 때 대들다가 아버지의 팔에 부딪혀 입술이 터진 적도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자라는 동안 한 번도 매를 들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런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심장 판막이 망가져 수술을 해야 했을 때,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까 봐 두려웠다. 미워했던 아버지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후회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수술 전, "제 심장을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라고 했던 말을 아버지는 기억하셨고 고마워하셨다.
연세를 생각해 인공판막 대신 돼지판막을 이식받으셨다. 수술 후 나는 자주 아버지와 통화하면서 "사랑해요", "감사해요", "고맙습니다"를 꼭 잊지 않았다. 쑥스럽지만, 용기내서 자주 할때마다 아버지의 심장이 잘 뛰게 될거라는 믿음으로 자주 표현한다.
사랑한다는 말한마디에 아버지와의 벽도 사라지고 가슴에 맺힌 미움도 풀렸다. 이제는 살아계신 아버지가
항상 감사하게 느껴진다. 지금은 아버지께서 "우리 딸 최고야, 사랑해 우리 딸"이라고 해주신다.
그 시절 막노동하시며 새벽에 나가고 새벽에 들어오시던 아버지의 고달픈 삶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사셨던 훌륭한 아버지로 기억할 수 있어 감사하다.
"사랑한다"라고 말할 때마다 아버지의 심장이 힘차게 뛸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심장아, 좀 더 힘을 내줘. 울 아버지 오래 볼 수 있게’.
”아버지 사랑해요.” 전화기 너머로
"그래, 딸. 나도 사랑해”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