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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응급의작가 Nov 03. 2021

완벽주의자의 하루를 망치는 법

무기력증에서 벗어나는 방법 1 - 하루의 시작을 나에게 맞추기



완벽주의자의 하루를 망치는 법

1. 일어날 시간에 맞춰둔 알람을 몰래 꺼버린다.

2. 매일 쓰는 펜이나 노트를 숨긴다.

3. 주변을 어지럽힌다.


자신이 계획했던 일을 제시간에 시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완벽주의자들은 하루를 포기하곤 한다.

조금 늦게 일어났어도 차분히 다음 할 일을 해 나가자, 라는 마음이 도통 들지 않는다.

제시간에 일어나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는 자신에게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급격하게 우울해지고, 모든 일에 심술이 나고, 뭘 해도 심드렁하다.

그런 하루하루가 지속되다 보면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인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해도 쉽게 피로해지는 사회에서 완벽주의자로 살아가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하루의 시작조차 내 맘대로 되지 않으니 짜증이 쌓이고 우울감이 쌓인다.


어렸을 적부터 완벽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나는 목숨이 세 개인 게임을 하다가 한 번이라도 죽으면 게임을 꺼버렸다.

나머지 두 개의 목숨으로 끝까지 해보면 될 것을 한 번의 실패에도 기분이 상해 게임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무엇을 하든 완벽하게 해내야만 스스로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살아가는 건 게임보다 훨씬 고난도의 문제였다.

게다가 목숨은 하나가 아닌가.


어쩔 수 없이 계속 살아는 가지만 그냥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늘 싸워야만 했다.


육아를 하기 전까지는 그나마 괜찮았다.

삶의 어려움이 있고 여러 과제들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 나 스스로 컨트롤 가능한 범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아를 시작하고 나서는 정말, 죽고 싶었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일들이 시시각각 벌어졌다.

잠도 늘 부족해 예민해진 상태에서 하루 종일 칭얼거리는 아이들과 씨름해야 했다.

원인도 찾지 못한 채 아이가 아파 입원을 했을 때는 삶이 내 통제권 밖에 있다는 걸 여실히 느끼며 절망했다.


육아도 일도 척척 잘 해내는 사람도 수없이 많은데, 나는 왜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걸까.


단 하루도 '완벽'하게 잘 해내지 못하는 날들이 길어졌고,

결국, 나는 나라는 행성에서 떠나 훌훌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어. 


입 밖으로 숨겨왔던 말을 뱉어내고 나니 덜컥 겁이 났다.


정말 못할 것도 없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내가 떠나고 난 뒤, 남아있을 소중한 것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번 해보자, 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시간 바꾸기'였다.


티시 해리슨 워런의 <오늘이라는 예배>를 읽다가 유대인들은 우리와 시간 개념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유대인들은 해가 질 때를 하루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하루의 시작을 밤으로 설정함으로써 삶이 자신에게 달려있지 않고 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란다.(저자는 밤에 잠을 자는 인간은 무방비상태에 있기 때문에 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책을 읽으며 내 삶 역시 내 뜻대로 모두 통제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하지만 하루의 삶을 충실하게 꾸려가고 싶은 마음은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금은 다른 차원의 이유에서였지만, 어쨌든 나 역시 하루의 시작점을 밤으로 바꾸기로 했다.


하루 중에서 그나마 가장 방해받지 않고 잠깐이나마 나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시간.

일어나기 힘든 아침보다 훨씬 나은 컨디션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시간.


매일 저녁 9시. 나만의 하루가 시작된다.


저녁 9시가 하루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니,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첫째로 아침보다 훨씬 덜 피곤한 상태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둘째로 아침에 비해 훨씬 정확한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었던 사람이라 기상 시간에 따라 하루의 시작이 들쑥날쑥했었다.)

셋째로 육아로 지치고 힘든 마음이 저녁 9시가 가까워질수록 새로운 하루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뀌게 되는 걸 경험했다.

넷째로 아침이 새롭게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밤부터 이어지는 시간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니 아침에 일어나는 것에 대한 부담이 많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다시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하루가 쌓이니, 우울감과 무기력증이 많이 해소되었다.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삶에 대한 의지가 생긴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시간에 맞추어 살다가 나에게 시간을 맞추어 살기 시작하자 숨통이 트였다.


그러고 나니 하루뿐만 아니라 일주일, 한 달, 일 년, 십 년도 내 속도에 맞추어 내 방향에 맞추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주의자의 하루를 망치는 것이 아주 쉬운 것처럼, 완벽주의자의 하루를 기분 좋게 바꾸는 일도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오랜 시간 무기력증에 빠져있던 내가 조금씩 다시 빛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 작은 방법이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기록해본다.


하루의 시작점을 나에게 맞추고 나니 이런 점이 좋았다.

1. 피곤하게 눈을 뜬 상태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고, 말짱하게 깨어있는 상태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2. 정확한 시간에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3. 오후가 되어 지친 마음이 새로운 하루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된다.

4. 아침에 대한 부담감이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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