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32분 440번 셔틀버스를 타고 Val Fiscalina에 내리니 흐리고 궂은 날씨에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트래킹을 하러 나와있어 기운이 난다.
일요일이라 브라이에스 호수 Lago di Braies는 붐빌 것 같으니 오늘은 어디로 가면 좋을지 호스트에게 물으니 지도를 펼쳐 표시해 주면서 440번 셔틀버스를 타고 네 정류장 가서 Val Fiscalina에서 내리면 로카텔리 산장까지 걸어서 3시간 걸린다고 알려준다. 로카텔리산장까지 여기서 걸어갈 수 있다면 닷새 후 체크아웃하고 로카텔리 산장으로 갈 때 아우론조 산장까지 버스 타고 가서 걸어갈 게 아니라 여기서 걸어서 가면 되겠다.. 근데 나중에 걸을 건데 오늘 뭐 하러 걷나? 싶어 잠시 고민하다가.. 나 같은 길치가 그날 무거운 배낭 메고 헤맬지도 모르니 오늘 그냥 한 번 걸어가 보고 길을 익혀서 나중에 헤매지 않고 걸어갈 수 있으면 좋으니 그냥 오늘도 걷고, 담에 또 걷고 그러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길을 나섰다.
유모차를 끌고 온 가족도,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산책 겸 천천히 걷는 넓고 평평한 길을 한 30분쯤 걸으니 Rifugio Fndovalle 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길이 두 갈래로 갈린다. 오른쪽으로는 로카텔리산장까지 3시간, 왼쪽은 Rifugio Comici까지 2시간 30분이라고 쓰여있다. 아... 잘됐다. 그럼 오늘은 왼쪽길로 가면 되겠다.
Rifugio Fondovalle / Talschlusshutte (같은 장소 두 이름. 독일어와 이태리어. 엄청 헷갈리게 만든다..)
처음 30분 정도는 아주 평탄한 길이더니 산속으로 들어서면서부터는 꽤나 경사가 심해지는데, 올라가던 사람들 몇몇이 다시 내려온다. 꽤 경사가 심한 게 힘들어 보인다며 그냥 내려간다면서... 정말 위험해 보이지는 않은데 힘들어서 중간중간 쉬다 보니 3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도착했다. Rifugio Comici를 검색하니 오르티세이 Monte Seura에서 걸어 올라가 밥을 먹었던 럭셔리한 Emilio Comici 가 나와서 헷갈렸는데 여긴 Rifugio Zsigmondy Comici라고 해야 나온다.
산장 냅킨에 그려진 주변 지도
1886년부터 이 자리에 있었는데, 현재의 산장건물은 1930년에 지어졌으니 백 년도 넘은 곳이다. 산장은 작고, 가는 비도 살짝살짝 오락가락하는 데다 쌀쌀해서 다들 산장 안에서 밥을 먹느라 복닥복닥... 빈 테이블이 없다. 어찌해야 할지 물어보니 비어있는 의자에 같이 앉으면 된다기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합석을 했다.
내 맞은편 식탁에서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면서, 서너 살 밖에 안된 아이와 함께 밥을 먹고 있는 젊은 부부는 도대체 여길 어떻게 올라왔을까.. 여긴 차가 올라올 수 있는 길이 없던데... 올라오는 도로가 따로 있는 건가 했는데, 알고 보니 그 둘만이 아니었다. 7살, 5살 반 남자아이들까지 아이들만 넷. 두 돌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아빠가 캐리어로 업고, 등에 작은 배낭을 멘 엄마는 갓난아기를 앞으로 안고 다 함께 걸어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맨 앞에 캐리어를 맨 아빠, 중간에 두 아이들, 그리고 맨 뒤에 엄마 이렇게 걸어내려 가는데, 내가 같이 걸어도 되겠느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해서 아이들과 엄마 중간에 끼어서 내려갔다. 사실 어린 남자아이들이 살짝 걱정도 되고, 아이들이 어떻게 걷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혹 중간에 도움이라도 될까 싶은 마음에 아이들 뒤를 천천히 따라 걸었다. 젊은 엄마는 아이를 안고도 씩씩하게 잘 걸으면서 중간중간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면서 챙겼고, 아빠도 가다가 중간중간 서서 뒤를 돌아보며 아이들을 기다렸다가 잘 따라오는지를 확인하기도 하고, 주의해야 할 구간에서는 미리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며 기다려주었다.
비까지 살짝 와서 가끔씩 미끄럽기도 하거니와, 흙길도 아닌 좁고 경사가 심한 돌길이라 걱정되었는데, 7살짜리는 그래도 잘 걷는데 5살짜리는 발을 뒤꿈치부터가 아니라 앞꿈치부터 내딛으며 걷는 게 영 불안 불안한데도 중간에 2번 넘어지고는 잘 내려갔다. 속도도 그저 내가 보통 걷는 속도보다 살짝 느린 정도. 그 경사지고 미끄러운 돌길을 다람쥐처럼 어찌나 잘도 내려가는지.. 넘어져도 투정 한 마디 없이 그냥 그러려니 하고는 툭툭 털고 다시 걷는다.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어른들도 힘들어서 올라오다가 말고 다시 돌아내려가는 이런 험한 산을 능숙하게 걷다니! 어린 두 형제가 내내 조잘조잘 떠들어가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으니 아빠가 돌아서서 포즈를 취해준다. 씩씩하고 건강한 가족.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걸으면서 살펴보니 아이들 둘 다 트래킹 복장에 트래킹화를 신었다. 이곳은 아이들용 등산용품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유심히 보니 돌로미테에서 만난 아이들 거의 모두 트래킹화를 신고 있었다.
아이들과 자주 이렇게 산에 오르느냐고 물었더니 휴가 때나 쉬는 날에 종종 함께 산에 온단다. 그렇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걸은 아이들이니 어른들도 힘든 산길을 걷는 게 당연한 듯 투정 한 번 안 부리고 잘 걷지...
아이들도 대견하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심지어 업고, 안고 산에 오르는 젊은 부부가 너무나 대견하고 예쁘다.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함께 걸어서 즐거웠고, 당신네 가족을 만나서 함께 걸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며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참 아름다운 가족.. 많이 부럽다. 걷는 내내,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