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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혜경 Aug 20. 2023

돌로미테.. 그 한 달간의 기록

돌로미테 24일 / 세스토 첫날 /  23. 07. 01


세스토 Sesto로 이동


어젯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시 깼지만 곧 다시 잠이 들어 아침까지 잘 잤다. 미국 시애틀에서 비행기로 베니스에서 내려 렌터카를 운전해서 오느라 어제 그렇게 늦게서야 도착했다는 두 여자아이와 남자 한 명. 짐을 보니 엄청나다. 헬멧까지 챙겨 왔길래 비아 페라타 via ferrata 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냥 5일간 하이킹. 근데 짐은 거의 알타비아 전코스 완주할 태세..  귀여워라..ㅎ


산에서 먹을 간식은 또 얼마나 많이 챙겨 왔는지.. 거의 한 보따리.. 접이식 물병을 보여주며 산에서 걷다가 물을 채워 넣을 곳이 있는지 묻는다.

'얘들아~ 돌로미테에선 그런 거 거의 필요 없단다.  가는 데마다 산장이 많아서 물 걱정은 안 해도 되고

간식도 거의 필요 없단다~ ' 풋풋한 아이들의 걱정 어린 질문에 속으로 웃으면서,

"물은 그냥 산장 수도꼭지에서 채워 넣어도 되고, 아주 가끔 물을 받을 수 있는 데가 있기도 해"라고

알려주었다.


미국에서부터 6시간을 날아와 닷새동안 야무지게 걷다가 가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장비며 간식까지 다 챙겨 온 아이들이 너무 귀엽다.  방안에 하나밖에 없는 콘센트에 꽂아놓은 내 충전기를 건드리거나 신경 쓰게 하지도 않고 순하고 예의 바르다.


어제는 이태리 할아버지와 젊은 여자애, 남자애랑 방을 같이 썼는데 할아버지랑 여자애가 어찌나 신경질적이고 무례하게 굴던지.. 내가 핸드폰을 충전기를 꽂아놓고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아직 충전도 안 됐는데 내 충전기를 뽑고는 떡 하니 자기 폰을 꽂아놓고도 사과 한 마디 없이 당당하고, 우린 9시에 불 끄고 잘 건데 넌 몇 시에 잘 거냐고 내 자는 시간까지 따져 묻질 않나.. 그래도 남자아이는 그 둘이 나가자 구름에 가린 창밖 풍경이 아름답다며 이리 와서 좀 보라며 자기 침대옆 창가자리를 내게 내주었었다.


          왼쪽 / 아침 아우론조 산장앞. 한치 앞도 안보인다.                        오른쪽 / 도비아코 Dobiacco/Toblach, 말러 페스티벌

오늘은 세스토 Sesto로 이동하는 날. 아우론조에서 도비아코까지 가는 버스도 역시 15유로. 여긴 일단 들어오려면 무조건 왕복 30유로 교통비가 기본이네..ㅠ  

9시 좀 넘어 나와서 11시쯤 숙소에 도착했다. 조식포함 1박 45유로인데, 구글 리뷰는 좋은데 검증된 리뷰는 아니라고 뜬다. 산장 도미토리에서 2박을 한 후라 좀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비싸더라도 좀 좋은 숙소를 예약할 걸 잘못했다 싶어 살짝 후회된다.


그런데 웬 걸~~  너무나 마음에 쏙 든다. 깔끔하고 넓은 방엔 큼직한 옷장, 테이블과 의자도 갖춰져 있고, 전망 좋고 넓은 테라스엔 썬체어도 있다. 버스 정류장까지 2분 거리임에도 아주 조용하다. 무엇보다도 호스트가 지도를 펼쳐 여행자에게 필요한 지역정보들을 쭉 일람해 주고, 레스토랑을 물어보니 특징들을 알려주면서 일일이 표시하며 설명해 준다. 이런 숙소가 최고다. 제대로 관리되고, 언제나 호스트와 소통할 수 있고, 여행에 필요한 정보들을 갖춰놓고 언제나 게스트의 요청에 답하고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내 방 테라스 풍경

도비아코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부터 예감이 좋더라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지나면서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내게 하나같이 웃으며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고, 버스 타고 오는 길은 한적한 전원풍경. 그리고 도착하니 작은 마을은 예쁘고 차분하다. 그간 복잡하고 교통도 나빴던 코르티나 담페초를 벗어나 이곳으로 오니 다시 지역버스이용권을 주고, 다양한 여행정보들이 제공되고..


짐을 풀고, 밀린 빨래를 해놓고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마침 숙소 바로 앞에서 트래킹을 하고 내려오는 커플이 있길래 그쪽으로 트레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자기들이 쓰고 있는 지도앱을 보여주면서 길을 알려주었다. 트레  일 번호가 다 적혀있고, 현재 있는 위치를 추적할 수 있어서, 오프라인 지도를 다운로드해 놓으면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맞는지 확인할 수가 있다. 이것만 있으면 굳이 타바코 맵이나 AllTrails 앱에서 유료 지도를 다운로드할 필요가 없겠다.  내가 무슨 대단한 트래커도 아니고, 평범한 트레일들을 걷는 건데.. 내가 앱을 묻자, 그 자리에서 내 폰에 앱을 깔아주고 간다.  여기 닷새만 있어야 한다는 게 참 아쉽다~


호스트가 알려준 agriturismo restaurant Kinigerhof에서 굴라쉬를 주문했더니 러시아에서 먹던 수프인 굴라쉬가 아니라 소고기를 오랜 시간 소스에 푹 졸인 음식이 나왔다. 이탈리아 굴라쉬는 러시아 굴라쉬랑 다른가 보다.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었는데.. 그래도 음식은 맛있다. 이태리에 오면 언제 꼭 농가민박 agriturismo에서 자면서 밥을 먹고 싶었는데... 테라스에 앉아 맞은편 산 경치를 바라보며 먹었다. 고기, 달걀, 과일, 야채 등 농장에서 직접 거둔 신선한 재료들로 만든 데다가 빵이나 디저트까지도 다 직접 만든 것들이기에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계산을 하려고 보니 내 작은 잔돈지갑이 없다. 큰 지갑이 배낭 안에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짐을 풀면서 내 방 탁자 위나 어디에 꺼내놨겠거니 했는데 방에 돌아와서 아무리 찾아도 없다. 아까 버스탈 때 15유로 내고는 주머니에 넣은 것 같은데 혹시 버스 안에서 흘렸나? 어제 100유로를 더 넣어놨는데.. ㅠㅠ


좀 걷고 나서 사우나에 가려고 스틱을 챙겨 나왔는데 점심을 먹고 나니 시간여유가 별로 없어 그냥 바로 가야겠다. 세스토 교통카드는 440번 셔틀버스만 이용이 가능한데, 이 버스가 세스토 지역 내 관광지를 구석구석 데려다준다.  대신 세스토를 벗어난 지역은 해당이 안 된다. 오르티세이에서 받은 교통카드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이 가능한데 여긴 좀 아쉽다. 하지만 오르티세이 교통카드가 아직 유효하니 세스토 지역 외에서는 이걸 쓰면 되니까..  

 


산장에서 이틀을 있느라 조금은 피로도 쌓였고,  특히나 비가 오락가락 스산한 날씨라 혹시나 근처에 사우나가 있는지 물었더니 약간은 생뚱맞은 이름의 사우나를 알려주었는데, 이름이 Caravan Park.  캠핑장과 글램핑, 호텔이 같이 있는 꽤 큰 규모의 리조트 시설이다.


수영장만 이용할 수도 있고, 사우나를 이용하면 수영장은 무료. 3시간에 31유로인데 4시간 넘게 있다 나오느라 30분당 2유로씩 6유로, 타월 5유로. 총 11유로를 더 내고 나왔는데도 하나도 안 아깝다.

오늘같이 흐리고 스산한 날에는 사우나가 최고지~

그런데 사우나는 수영복 차림은 금지. 타월을 두르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 마저도 오가는 통로에서만 두를 수 있고, 사우나나 바스에 들어갈 땐 수건은 밖에 걸쳐두고 맨 몸으로 들어가야 한다.  물론 남녀 구분 없이 혼탕.


물속에 들어갈 때야 그렇다 치더라도, 사우나 안에선 아무래도 처음엔 어색하고 불편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대담해지기 시작.  사우나가 워낙 여러 개라 안에 들어가면 혼자만인 경우도 많고, 두셋이나 서너 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처음엔 수건으로 반쯤 가리고 있다가 나중엔 점점 노출모드. 아무도 없을 땐 완전히 벗었다가 누가 들어오면 살짝 가리고... 사실 아무도 없는 작은 사우나안에서 다 벗고 있으면 참 자유롭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실내, 실외, 여러 종류의 다양한 사우나와 버블바스, 야외쉼터, 실내쉼터 등을 왔다 갔다 드나들다 보니 4시간도 아쉬웠다. 야외 사우나에 들어가 땀 흘리고 나와 비 맞으며 잔디밭을 맨발로 걸어 돌아다니다가 이번엔 버블바스에 들어가 물 마사지 하고, 다시 사우나에 들어갔다가 냉수폭포에서 찬물 뒤집어쓰고.. 그냥 한나절 이 안에서 들락날락하며 쉬면 딱 좋겠다.


밖으로 나오니 8시가 넘었는데 버스가 끊겼다. 8시 반까지는 있는 걸로 알았는데..  지나가는 차를 히치하이킹하려니 다 반대편 방향.  드디어 sesto 쪽으로 가는 차가 오길래 히치하이킹을 시도했으나 죄다 그냥 패스~~

비는 오는데.. 흥! 치사해서 내 걸어간다. 한 시간 정도야 뭐.. 하고는 걸어가는데 반대편 방향으로 가던 차 한 대가 바로 내 앞에서 U턴을 했다. 혹시나 하고 보니 사람이 꽉 찬 듯.. 근데 창문을 내리며 타라는 게 아닌가..

젊은 두 커플이 타고 있다가 내게 한 자리를 비워준다.  


타자마자 일행들을 죽 소개하더니, 내 이름을 묻고, 돌로미테엔 어떻게 오게 됐냐.. 등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차로는 10분이 안 걸리는 거리. 너무나 고맙게도 숙소 근처에 내려주고 갔다. 고마운 친구들~~


너무너무 배가 고파 마지막 남은 컵라면과 누룽지를 다 털어 넣어 먹고는 숙소 앞 바에 앉아 맥주 한 잔. 숙소가 버스에서 내려 2분. 근처에 맥주 마실 수 있는 바, 슈퍼마켓, 레스토랑 등이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게다가 지하엔 작은 냉장고와 전기포트, 식탁이 갖춰진 공용주방까지 있으니 금상첨화. 친구들끼리 온 사람들은 지하 식탁에 앉아 와인을 사다가 와인파티를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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