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생존기
딸 : 엄마, 지난달 계속 집에 늦게 들어왔잖아.
주니 : 응. 왜?
딸 : 엄마네 회사 신고해. 근로시간 초과했어.
주니 : 무슨 말이야?
딸 : 학교에서 근로기준법 배웠어. 주 52시간 넘게 일하면 안 된대.
주니 : 그래? 엄마 그런 거 관련된 일하잖아
딸 : 그럼 잘 알겠네. 52시간 넘게 일했어. 새벽 5시에 퇴근한 적도 있었잖아. 다 신고해야지.
중학교 3학년인 딸이 사회 수업 시간에서 배운 근로기준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법은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으면 신고해야 한다고 한다.
딸 : 왜 가만히 있어? 내 말 틀렸어?
주니 : 아냐. 네 말 맞아.
딸 : 신고하는 거야?
말문이 막혔다.
딸의 단순한 질문이 내 삶의 복잡함을 드러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중학교 시절, 내게 진정한 영향을 준 선생님이 있다.
열정적으로 가르치시고, 방학마다 손 편지로 마음을 전해주셨다.
그 따뜻한 편지 속 시들은 사춘기 방황 속에서 내게 큰 힘이 되었고,
내 존재가 특별하다는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 덕분에 나도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나는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 속에서도 회사에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
공평하지 않은 업무와 인력 부족의 책임을 혼자 떠안으며, 내면의 회의감이 커졌다.
근로기준법을 지적하는 딸에게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 달 내내 휴일 없이 일만 하던 어느 날,
임원이 되겠다며 견디는 자신에게 회의감이 밀려왔다.
“이게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월급에 끌려다니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날부터 밤마다 눈물이 나왔다.
사춘기 소녀의 찬란한 꿈은 사라지고,
하루하루 꾸역꾸역 버티며 주름 가득한 중년의 여인만 남아 있다.
딸이 말한 근로기준법처럼, 나도 삶의 기준을 되찾아야 할 때가 아닐까?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변화를 열망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