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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링 Aug 23. 2024

역병은 우울감을 가져왔다.

남들보다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내 세상이 무너진 나날들

내 첫 해외생활이 시작되던 그 날, 역병이 온 세상을 지배했다.


대학에 합격한 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대학을 가지 않으면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이 사라지던 그 순간을 나는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그때 즈음이었을 거다. 코로나라는 역병이 온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나날들이. 갑자기 한국에 확진자가 증가하기 시작하고 점점 하늘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과 마주할 생각에 잔뜩 들떠있던 나는 수험생활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한 번, 좌절감을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큰 일도 아니었건만 그때는 왜 하늘길이 막힌다는 사실이 그리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는지. 그렇게 다가온 3월. 일본은 한국인의 일본 입국을 완전히 봉쇄한다는 방역지침을 발표했다. 그 뉴스와 마주한 나는 조바심에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나 일본으로 가야겠어."


그렇게 내 최악의 첫 해외생활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 시작됐다. 그 시절의 나는 무슨 용기였는지 일본에 아는 사람 한 명 없던 그 시기에 전화번호도 집도 없이 캐리어 하나만 끌고 일본으로 넘어가기로 결심했다. 다가온 출국 날, 승객보다 직원이 더 많은 것만 같았던 그 텅 빈 공항을 나는 내 울음소리로 가득 채웠다. 얼마나 울어댔으면 출국장에서 여권을 검사해 주시는 분들이 검사 전 부모님이랑 인사 한 번 더 하고 오라고 이야기해 주셨던 기억이 있다. 내 해외생활은 눈물로 시작해 우울로 끝이 났다.


집이 없어 에어비앤비에서 살게 됐고, 외국인의 신분증 역할을 하는 재류카드는 코로나로 인해 발급 자체가 멈춰버려 나는 약 2 달이라는 시간을 일본에서 유학생이 아닌 관광객으로 살아야만 했다. 신분증이 없으니 계약할 수 있는 통신사도 계약할 수 있는 집도 너무나 한정됐다.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친구들은 부모님이 일본에서 유학 경험이 있으신 분 들이거나 가족 중 일본에 거주 중인 사람이 있는 친구들이었기에 나보다 수월하게 휴대전화를 계약하고 집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새로운 조바심이 시작됐다.


처음 계약한 집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65만 원 가까이 되는 월세를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좁은 방에 자꾸 등장하는 벌레에 하수구에서는 냄새가 역류했다. 대학교 수업은 온통 전부 온라인으로 진행되었기에 사실상 일본에 있어도 의미가 없었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집에서 밤낮으로 대학교 수업만을 들으며 일본에서의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반복해야만 했다. 그 시절의 내가 그 시기를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은 애니메이션과 웹툰이었다. 애니메이션과 웹툰을 보는 순간만큼은 현실에서 도피해서 웃고 울 수 있었기에. 그렇게 지옥 같던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간 나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부모님과 함께 그리고 친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산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지옥 같은 경험을 통해 공부한 게 있다면, 내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평범하지 않았고, 그 평범한 일상 하루하루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6개월은 일본에서의 6개월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그렇게 2021년 3월이 되고, 오프라인 수업을 진행한다던 학교의 발표에 나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내 두 번째 일본 생활은 2020년과 비교하면 행복한 순간들도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집을 구하기에는 초기비용이 아까워 셰어하우스에 들어가게 됐는데, 학교나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갈 곳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어딘가 안심감을 줬던 것 같다. 부엌 공간이 많이 지저분해 요리는 거의 못 하고 살기는 했지만, 첫 번째 집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이었다고 확신한다. 2학년 때 내가 '힘들다.'라고 느꼈던 부분들은 굉장히 단순하고 모두가 경험해 봤을 법한 일들이었다. 일본어 공부와 사회 경험을 쌓기 위해라는 명분으로 시작한 아르바이트 일이 너무 힘들었고, 나보다 여유로운 친구들의 "너는 아르바이트를 왜 그렇게 열심히 해?"라는 악의 없는 질문들이 아르바이트 속에서 지쳐가는 나를 괴롭혔다는 정도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제아무리 가까운 일본이라고 해도 나보다 금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 있는 친구들이 많았기에 친구들의 씀씀이에 맞추기 위해서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렇다고 내가 가난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서포트해 주셨고,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건 오로지 내 욕심 때문이었으니까.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조금만 줄였어도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그때의 나는 참 철이 없었었나 보다. 


그렇게 다시 일본에 간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여름 방학이 거의 끝나가고 다시 코로나가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많은 학생들이 한 교실에 모이는 걸 방지하기 위해 오프라인과 온라인 수업을 동시에 진행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2021년으 일본 생활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지만, 한국에 가면 이런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다시 한국으로의 도망을 선택했다. 셰어하우스였기에 처분할 가구가 없어서 딱 가져온 짐만 가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간 나는 큰 무기력함에 빠져버렸다. 한국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보겠다던 결심은 어디로 갔는지 결국 다시금 한국으로 도망치는 나 자신을 마주해 버렸기 때문이었을까?


방학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고 자는 생활만을 반복했다. 왜인지 그런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친구조차 만날 수 없었다. 침대 위에서 핸드폰으로 온갖 소셜미디어를 뒤지는 게 유일한 하루 일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에서 한 브이로그를 발견한다.


'웹소설 작가 브이로그'


고등학생이 되며 본격적인 입시 공부에 들어가 한참을 읽지 못했었지만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던 때의 나는 웹소설을 참 좋아했다. 어렸을 때부터 글 쓰기를 좋아했던지라 작가에 대한 막연한 꿈은 있었지만, 대학교 입시를 거치며 꿈이라는 걸 잊고 산지 오래였던 나에게 그 브이로그는 새로운 설렘을 주었다. 그렇게 그날부터 유튜브에 '웹소설 작가 브이로그'로 검색해서 나오는 영상을 전부 시청했다. 그렇게 한 달을 작가님들의 브이로그에 빠져서 살았을까. 브이로그를 보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

나도 웹소설 써보고 싶은데?


성인이 되고 좌절감만을 맛보던 나에게 새로운 꿈이 피어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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