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근 Sep 08. 2024

관상

관상에 대하여

 현대 사회에서 관상에 대한 반응은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유사과학이다라고 하는 부류다. 검증되지 않은 그저 미신에 불과하거나, 편견의 한 종류일 뿐이라고 하는 반응이다. 관상을 증명한 논문이나 연구가 없으며, 있다고 해도 이를 완벽하게 증명해내지 못했다는 주장이며, 이를 믿는 것은 골상학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통계학의 산물로, 충분히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반응이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큰 수의 법칙을 삼아 이렇게 생긴 사람은 이런 행동을 주로 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생겨서 이런 행동을 한다' 라기보다는 '이런 행동을 주로 하다 보니 이렇게 생긴 거다'라는 주장도 더러 보인다. 마지막으로는 어떨 때는 맞고, 어떨 때는 틀리니 그저 재미로 보겠다는 반응이다. 과학인지, 과학이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저 재미로, 소소한 농담거리로, 스몰토크의 주제로 알맞다는 생각이다.
 
 세 가지 반응이 있다고는 했지만, 사실 이를 과학으로 믿는 사람에 대한 시선은 그리 좋지 않다. 과학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들을 섣부른 판단의 소유자, 이해심이 부족한 사람, 더 심하게는 교육이 덜 된 사람으로 바라본다. 정치적 올바름이 등장하게 되면서 이런 시선도 급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시선이 급증해도 관상에 대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다. 경험적인 통계가 쌓이면서 어느 정도 신뢰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있을 것이며, 단순히 외모가 아니라 행동거지도 관상에 포함시켜 판단하여 정확도가 높아졌다고 하는 주장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세 번째 반응이었던 단순 가십거리로서의 역할도 하기에 관상에 대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관상은 어쩌다 나오게 된 것일까? 이는 인간의 투쟁, 도피 시스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투쟁, 도피 시스템은 급성의 스트레스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용어다. 여기서 급성의 스트레스 자극은 현대의 기준보다는 고대의 기준으로, 야외에서 야생동물을 만난 경우 혹은 그런 위협이 되는 대상을 만난 경우를 말한다. 이런 경우 그 대상과 맞서 싸우거나, 도망가야 하는데 둘 중 어느 쪽이든 신체적으로는 비슷한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빠른 판단과 대처를 위해 감각은 예민해지며, 신경계로 혈류 공급이 증가하게 된다. 좀 더 민첩하게 대응해야 하기에 근골격계에는 혈류가 증가하지만, 민첩한 대처에 필요가 없는 소화계와 같은 기관에는 혈류가 감소하게 된다.

 인류는 스스로에게 위협이 될만한 상대를 파악하고, 이에 빠른 대처가 가능한 시스템이 기본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야생동물을 만날 일은 이제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위협이 될만한 상대라는 것은 야생동물보다는 같은 사람 혹은 특정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투쟁 도피 반응은 기본적으로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사람 그 자체를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일반적으로 사람을 만날 때는 투쟁 도피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이와 비슷한 판단을 할 필요가 생겼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개인에게 위협적인 것은 야생동물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특정 인물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해당 사람의 출신, 살아온 환경, 사상 등을 파악해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들을 다 알아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숨긴 속내나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기에 짧은 시간 내에 그 사람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사람이 살아온 수십 년을 단 몇 분, 몇 시간 내에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들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인지 자원이 너무나도 많이 소모된다. 인지 자원만 소모되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도 상당히 소모되게 된다. 그 사람과 대화를 하는 시간부터 인지 자원을 소모하는 시간, 즉 생각하는 시간까지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문제는 그렇다고 정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이 모든 것을 술술 말해주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정보나 생각을 숨기고 있을 테니 말이다.
 
 진짜 문제는 사람은 정답이 있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처음부터 사람을 만나서 이것저것 물어보며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우니 우리는 범주화를 하기 시작한다. 이 범주화가 곧 편견의 시작이자 관상의 시작이 된다. 사람을 자신만의 범주에 넣어 판단하면 투쟁 도피 시스템까지 갈 일도 없고, 인지 자원을 적게 사용할 수 있다. 들어오는 대로, 기계처럼 특정 범주에 넣고 판단해 버리면 정답도 얻고 인지 자원도 많이 사용할 필요도 없어지게 된다. 그 사람의 가정환경, 생각, 행동거지, 말투 등등 다양한 것들을 생김새 단 하나로 줄여버릴 수 있게 된다. 앞에서 이야기한 다양한 요소들을 생김새 단 하나로 판단하면서 인지 자원과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축약하자면, 관상은 사람의 복잡한 인지체계를 줄이기 위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 와서 관상은 어느 정도 유사 과학으로 통하고 있다. 아무리 통계의 산물이라고 말해봐야 이를 증명할 수단도 없으며, 대부분이 말하는 '통계'는 세상 모든 사람의 통계가 아니라 내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통계일 뿐이다. 그렇기에 사람마다 생각하고 있는 관상의 범주가 다를 수 있다. 특정 인물을 보고 누군가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할 수 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도 있다.
 
 필자 역시도 관상에 대해 어느 정도 가십거리로 동조하기도 하며 공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농담 정도로 동조하는 것이지 정말로 관상을 믿어서 동조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특정 인물에 대해 제대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대로 많은 인지를 열어둬야 한다. 많은 인지를 하게 되면 쉽사리 단언을 하거나, 편견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때부터는 범주화한 게 아니라 그 인물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고 알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범주화로 따지자면 그 인물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는 새로운 전용 범주가 생기게 된 것이다.


 
 관상은 결국에는 인간의 생존에 도움이 되게끔 만들어진 빠른 인지 체계일 뿐이다. 이를 과거에는 어느 정도 적용하는 게 도움이 됐을 수는 있다. 국가가 개인의 사상을 지배하던 시기에는 해당 인물이 어떤 나라에서 왔는지를 생김새로 파악하기만 해도 그 인물의 사상을 높은 확률로 맞출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는 국가가 개인의 사상을 지배하지 못한다. 특정 국가는 그렇지만,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국가에서는 같은 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같은 지역에서 살았다고 해도, 같은 환경에서 살았다고 해도, 접한 미디어나 지식이 다르면 개개인이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생김새라는 것은 유전자의 역할이 굉장히 크기에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시아인의 생김새와 유럽인의 생김새가 수 천년째 비슷하게 유지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렇기에 같은 아시아인이라고 해도 생김새는 비슷할지 언정 생각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오히려 전혀 다르게 생긴 유럽인과 생각이 비슷할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가볍게 판단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는 있다. 그 나라나 지역의 문화의 영향은 쉽게 무시하지 못하니 말이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의 사교육 열풍과 같은 특수한 문화는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렵다. 바로 옆나라에 있는 일본은 한국과 얼추 비슷하지만 이런 비상식적인 대학 진학률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한국인을 보면 다들 대학 진학이 목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사람의 행동, 억양, 대화를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 같은 한국인이라고 해도 대학 진학이 목표가 아닌 사람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이렇듯 현대 사회에서의 관상은 확증편향에 불과하다.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비슷한 행동을 할 것이라는 확증편향이다. 그렇게 믿고, 자신이 믿은 대로 행동한 사람을 보고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전히 통계적으로 옳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이들은 관상이 같지 않은데 비슷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글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관상을 믿냐는 친구의 질문에 나는 위와 같이 대답했다. 물론 저렇게 길게 답하지 않았지만, 위의 내용의 축약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다른 친구도 비슷하게 대답해 주었다. 관상이 어느 정도 가십거리로 재밌게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관상이 맞을 때도 있지만, 이를 전적으로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관상에 대한 생각은 처음 말했던 첫 번째 반응에 가깝다. 과거에는 높은 확률로 옳았을 수 있어도, 세계화가 진행되고 인터넷이 널리 보급된 지금에는 정말 뚜렷한 특징이 아닌 이상 (특정 집단의 징표와 같은 특징) 대화를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너무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것일 수 도 있다. 그렇게 느긋하게 판단하고 있으면 대처하기 전에 당할 수 도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괜한 사람을 편견으로 의심할 바에는 내가 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면 더 나은 사회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특별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