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혐오범죄의 구조에서 본 <앎과 삶 사이에서 서평>
마을 사회학자이자 칼럼니스트 조형근 작가님의 신간 <앎과 삶 사이에서>는 한 장 한 장이 주옥 같아서 무엇에 대해 초점을 써야 할지 망설여질 만큼 사유의 너비를 넓혀준 책이었지만, 내 삶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동물권에 대한 에세이를 읽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져서 그를 중심으로 서평을 겸한 에세이를 써보고자 한다.
이 책의 동물에 관련한 장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들었던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국내 지식인이, 그것도 조심스러운 중립의 외피를 벗고, 동물 문제를 이 정도 깊이와 정확도로 다룬 사례를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이미 여러 번 반복되어 왔지만, 반복된 말이 반드시 사유의 진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책이 인상적인 이유는, 그 문장을 윤리적 선언이 아니라 현실 판단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민법은 여전히 동물을 ‘물건’으로 분류한다. 그 결과는 잔인할 만큼 명확하다. 동물 학대와 살해는 재물손괴나 경범죄로 축소되고, 반복적 폭력조차 집행유예나 벌금형으로 마무리된다. 실제로 고양이를 잔혹하게 살해하거나 반려견을 고의로 죽인 사건들에서 가해자들이 받은 처벌은, 생명을 박탈한 행위의 무게와 전혀 비례하지 않았다. 이 솜방망이 처벌은 그저 우연도, 피해자인 동물보다 가해자인 사람을 우선했기 때문이 아니다. 대한민국 민법이 처음부터 동물을 권리의 주체가 아닌 소유의 대상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사회구조는 이 같은 사법 구조의 안전망 안에서 가해자를 위한 교활한 프레임을 짜넣는데 아주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동물에 대한 잔혹한 살해와 학대가 반복될 때마다 언론은 가해자의 특이성을 강조한다. 정신적 불안, 일시적인 분노, 개인적 일탈 등. 이 설명은 간단 명료하기에 편리하지만 더없이 무책임하다. 결국 사건은 빠르게 하나의 이탈로 수렴하며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가해자는 심신미약이나 합의를 명목 삼아 늘 면책된다. 대상이 합의의 대상이 아닌 길에 사는 생명일 경우는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을 경우도 왕왕 있다. 그러나 이 반복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치안과 질서가 유지되는 현대 사회에서 폭력은 언제나 사회가 덜 보호하는 존재부터 선택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동물 살해와 같은 범행은 명백히 혐오 범죄의 구조를 갖는다.
그리고 혐오 범죄의 이면을 면밀하게 파헤쳐보면, 이와 같은 유형의 범행은 가해자가 피해 대상을 해쳐도 되는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에 일어나곤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동물은 법적으로 물건이기에, 가해자의 폭력은 생명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재산을 손괴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엄연히 가해자의 범행으로 하나 혹은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는데, 법정에 선 가해자는 재물 손괴에 따른 처벌을 받을 따름이다. 잔혹함의 정도와 피해 개체의 수 같은 건 처벌의 수위와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 이는 정의의 실패다. 법이 동물을 권리의 주체로 상정하지 않기에 동물 혐오 범죄는 끝내 범죄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처벌받지 않거나 형편 없이 가벼운 처벌을 받고 복귀한 가해자는 끊임없이 이 증오범죄를 반복한다. 수많은 실험과 연구를 통해 동물에게 가한 폭력이 종국에는 인간에게 향할 수 있다는 경고가 수없이 제기되었음에도 사회적 위험 신호는 무시되고, 제도는 침묵한다.
저자는 이와 같은 범행을 개인의 비윤리성으로 돌리지 않는다. ‘사람들의 의식이 문제’라는 익숙하고 편한 결론 대신, 왜 그런 의식이 반복 재생산되는지를 끊임없이 독자에게 묻는다. 그 속에서 나는 예쁘면 데려오고, 귀찮아지면 버리는 문화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대답했다. 반려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상은 소비와 폐기의 논리가 그대로 작동하는 구조가 바로 대한민국의 애완동물 시장이다. 이것이야말로 동물을 물건처럼 다루는 태도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동물 혐오는 괴물 같은 개인에게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적 무감각과 제도적 방치 속에서 정상화된다.
나는 현재 17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산다. 그 중 상당수는 유기, 파양묘이다. 이 숫자는 내게 결코 자랑도, 미담도 아니다. 다만, 이 사회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쓸모없어진 순간’에 버려왔는지를 증언하는 숫자라고 생각한다. 구조 이후에 마주하는 것은 애정이 아니라 책임이다. 병원비, 공간, 시간, 그리고 끝까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각오. 이것이 빠진 상태에서의 ‘사랑’은 결국 또 다른 물건 취급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가 느낀 이 책의 미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동물 복지를 말하면서도 인간 중심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반복하지 않는다. 중성화는 폭력인가, 보호인가. 야생성은 회복되어야 하는가, 이미 인간과 공진화한 존재에게 그것은 가능한가. 저자는 답을 서둘러 제시하지 않고, 불편한 질문들을 그대로 남긴다. 이것은 회피가 아니라 윤리적 정직함이다. 쉽게 선해지는 대신, 복잡한 현실을 그대로 끌어안는다.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은 결국 정치와 입법을 향한다. 수 차례 예고만 되고 번번이 지연된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민법 개정과 공약으로는 소비되지만 법으로는 완성되지 않는 동물 복지의 제도적 방치 속에서 수없이 많은 폭력이 축적되었다. 말은 앞서가고, 책임은 유예되었다. 구두선의 전형이다. 법이 바뀌지 않는 한, 폭력은 개인의 일탈로 위장되고 구조는 유지될 것이다. 그렇기에 입법의 부진은 결코 중립적인 선택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수없이 정권이 바뀌는 동안 정체되어 있는 이 지연은 기술적 문제라기 보다는 정치적 판단의 결과이다. 동물은 투표권이 없기에, 우선순위에서 늘 밀린다. 정치권이 보호할 유인을 얻지 못할 때 입법적 조치는 늦어진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 독자에게 요구한다. 동물혐오 범죄를 불쌍한 사건으로 소비하지 말고, 사회가 허용하고, 어쩌면 종용하고 있는 폭력으로 읽을 것을. 연민을 넘어서 사유하고 구조적 모순을 비판할 책임을 독자에게 종용한다.
저자의 에세이는 우리가 어떤 생명을 보호할 자격이 있는 사회인가를 묻는 윤리 보고서에 가깝다. 국내 지식 담론에서 이 문제의식이 이렇게 정면으로 다뤄졌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도 늦었다는 감정도 든다. 그러나 늦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역시 출발이다. 적어도 저자는 동물에 대해 말하면서 사람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이 살아있는 감각을 지닌 채 내 마음 속에 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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