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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skim Aug 21. 2024

마음을 쉬고 도(道)를 즐길 만한 땅, 무장사지

치유와 행복으로 떠나는 문화유산 시간여행 

   마음을 쉬고 힐링할 수 있는 곳은 옛 절터가 제격이다. 흔히 폐사지라 부르는데, 그 용어보다는 옛 절터라는 말이 정겹고 본래 뜻에도 맞을 것이다. 오늘은 경주에서도 제법 떨어진 깊은 계곡에 있는 무장사(鍪藏寺) 옛터를 찾았다. 무장사라는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글자대로 해석하면 투구를 감춰둔 절이란 뜻이다. 절의 유래가 삼국유사에 나온다.  

    

  "서울의 동북쪽 20리쯤 되는 암곡촌(暗谷村)의 북쪽에 무장사가 있었다. 제38대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아버지 대아간(大阿干) 효양이 숙부 파진찬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절이다. 그윽한 골짜기가 몹시 험준해서 마치 깎아 세운 듯하며, 깊숙하고 침침한 그곳은 저절로 허백(虛白)이 생길 만하고 마음을 쉬고 도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었다.”     


   저절로 허백이 생기고 마음을 쉬며 도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에 세운 절이 무장사라는 말이다.  위의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절의 창건자는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부친인 효양(孝讓) 대아간이다. 그럼, 8세기 말엽 또는 9세기 초엽에 세운 사찰이라는 것인데 다음 기록을 보면 어리둥절하다.       

 

  “근래에 와서 불전은 무너졌으나 절만은 남아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삼국을 통일한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무장사라고 이름했다고 한다.”   

  

  태종은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을 말하는데 그는 7세기 중엽에 살았던 인물 김춘추다. 그렇다면, 태종무열왕 대에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퇴락 내지 폐사되었다가 원성왕 대에 효양이 중창했다는 말인가? 조선시대 인문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태종 대신 고려 태조 왕건을 창건자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 태조도 후삼국을 통일했으니 말은 되지만 고려시대라면, 10세기경에 무장사가 창건된 것이 된다. 기록이 엇갈릴 때는 절터에 남아있는 유적이나 유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절의 입구에서 남쪽으로 70m 내려가면 양 계곡으로 둘러싸인 삼각형 지형의 꼭짓점에 삼층 석탑 1기가 서 있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탑 양식이다. 탑신부는 지붕돌과 아래 받침돌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받침돌은 5단이다.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층마다 기둥 모양이 조각되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그런데, 2층 기단부에 동그란 안상(眼象)이 각 면에 2개씩 조각되어 있다. 탑의 이런 특징으로 볼 때, 탑의 건립 시기를 9세기 이후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면, 삼층 석탑은 효양이 절을 중창한 시점과 얼추 일치하므로 이때 건립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탑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금당 터가 나오고 그 오른편에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신라 애장왕 2년(801년)에 세운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이다. 비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기록이 보이는데, 신라 제39대 소성왕의 왕비인 계화 왕후가 소성왕이 훙서(薨逝)하자 명복을 빌기 위해 재물을 희사하여 아마타 불상을 조성했다는 내용이다. 

  통일신라 하대의 개창 군주인 원성왕에게는 김인겸이라는 태자가 있었으나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그의 아들 그러니까 원성왕의 손자가 후계가 되었는데 그가 소성왕이다. 그런데 소성왕 또한 병약하여 즉위 1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그 아들이 13세로 즉위해서 애장왕이 되었다. 이때 소성왕의 왕비 계화 왕후는 30대 초반의 나이였을 것이며, 부군이 왕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애통한 마음을 신앙에 의지하고자 했을 것이다. 공덕 중에 제일이 불전을 짓는 것이고 불상을 조성하는 일이다. 

  계화 왕후는 서라벌에서 동북쪽 20리 떨어진 암곡에 있는 무장사에 주목했다. 호국사찰로 알려졌고 내물왕계 왕통의 중시조인 원성왕 대에 크게 중창되었으며, 개인적으로는 왕후 자신도 내물왕계로 원성왕과는 혈연과 가계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적비에 나온 대로 풍광이 수려하고 고요하여 부군을 그리는 애통한 마음을 달래는 데는 안성맞춤의 적지(碧澗千尋)라고 여겼을 법하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무장사는 문무왕 대에 초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에 태종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삼국통일이 문무왕 대에 이루어졌고, 문무왕의 유조에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 살게 하였다.”는 내용에 비추어 보면, 실제 병장기를 무장산 암곡에 감추었다기보다는 문무왕 대에 오랜 전쟁이 종식되고 평화가 찾아왔다는 것을 만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가시적인 징표로 무장사를 창건하고 그런 내러티브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무장사에 숨은 뜻은‘평화’라는 메시지이다. 

  그 후 무장사는 어느 때부터 퇴락하였고 이를 원성왕 대 효양이 중창하였으며, 애장왕 대에 계화 왕후가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미타 불상을 조성하여 미타전에 안치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처럼 무장사 옛터는 많은 전설과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풍광이 고즈넉하고 계곡의 시원한 바람과 물소리가 마음을 쉬고 도(道)를 즐길 만한 땅임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현재도 심신을 휴식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힐링의 장소로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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