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약용의 수종사와 나의 수종사 추억 -
다산이 인생을 회고했던 그 자리에 서서
나도 살아온 나의 인생을 회상한다.
‘그래, 어떻게 살아왔는가?’ 20대의 내가 나에게 묻는다.
정약용(1762~1836)은 정조 7년(1783년) 22세 때 생원시에 합격했다. 문과도 아닌 소과(小科)에 합격했는데도 얼마나 기뻤던지 고향 마재로 돌아갈 때, 부친 정재원은 "이번 귀향길은 초라하지 않게 두루 친구들을 불러서 함께 가도록 해라.”라고 할 정도였다. 여기서 친구들은 아버지의 동료인 목만중(좌랑), 오대익(승지), 윤필병(장령), 이정운(교리) 등을 말하는 것이다. 아들의 과거 합격 귀향에 아버지가 자기 친구들을 붙여준 것이다. 이들은 함께 배를 타고, 광주 원님이 특별히 보내준 악대로 흥취를 돋우며 갔다. 젊은 날 정약용의 기분과 아버지 정재원의 부정(父情)을 느끼게 하는 흐뭇한 광경이다.
정약용은 집에서 사흘을 쉰 뒤 친구들이랑 가까운 운길산 수종사에 놀러 갔다. 이때의 정경이‘수종사에서 노닐다.’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초천에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나 수종사에 놀러 가려고 하는데, 젊은이 10여 명이 따라나섰다. 나이 든 사람은 소나 노새를 탔으며, 젊은 사람들은 모두 걸어갔다. 절에 도착하니 오후 3~4시가 되었다. 동남쪽의 여러 봉우리가 때마침 석양빛을 받아 빨갛게 물들었고 강 위에서 햇빛이 반짝여 창문으로 비쳐 들어왔다. 사람들이 서로 담소하며 즐기는 동안 달이 대낮처럼 밝아왔다. 서로 이리저리 거닐며 바라보면서 술을 가져오게 하고 시를 읊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나는 세 가지 즐거움에 관한 이야기를 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다.”(游水鍾寺記)
정약용이 말하는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그는 위 수종사 기문에서 “ 어렸을 때 노닐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되겠고, 곤궁했을 때 지나온 곳을 성공하여 찾아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되겠으며, 홀로 외롭게 지나가던 땅을 좋은 손님들과 맘에 맞는 친구들을 이끌고 온다면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겠다. 내가 옛날 아이 적에 처음으로 수종사(水鐘寺)에 놀러 간 적이 있었고, 그 후에 다시 찾은 것은 독서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늘 몇 사람과 짝이 되어 쓸쓸하고 적막하게 지내다가 돌아갔다.”라고 회고했다. 수종사가 정약용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이 글을 언제 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다산 정약용은 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환갑이 가까운 나이가 되어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그는 집에서 가까운 수종사에 가끔 들러 어린 시절 부모님 따라 절에 왔던 기억과 절에서 과거 공부하면서 희망에 부풀었던 젊은 날 그리고 과거에 패스한 후 득의양양해서 찾았던 수종사에서의 추억을 되새겨 보았을 것이다. 다산의 세 가지 즐거움을 대하면 너무나 따뜻하고 평범한 일상에서의 행복을 말하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진다.
지난해 공직에서 퇴직한 나는 다산의 인생삼락에 깊이 공감하여 내 인생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을 두루 찾아다녔다. 30년 만에 고향을 찾았고 학창 시절을 보낸 곳도 갔었다. 그러나 내 가슴속에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는 곳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수종사였다. 공교롭게 다산과 같은 마음이 들어 얼마 전 운길산 수종사를 찾아갔다.
1987년 8월 뜨거운 여름날 스물여섯의 나이로 나는 공직에 입문하였다. 학교만 다니다가 직장에 처음 들어가니 모든 게 낯설고 적성에 맞지 않아서 연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던 어느 날 동기가 불러서 나갔더니 무작정 나를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달렸다. 한참을 간 후에 도착한 곳은 운길산 수종사였다. 지금은 차가 절 입구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그때는 산 아래 주차를 하고 걸어서 올라갔다. 수종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저 멀리 보이는 두물머리 풍광을 한참 바라다보았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윽고 돌아서니 담벼락 기왓장에 쓰여있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묵언(默言)....”. 아! 그렇구나, 그리고 긴 세월을 견디며 공직을 마치고 나는 퇴직하였다. 그 시절 순간의 힐링이었지만 나는 한시도 수종사에 갔던 일을 잊지 않았다. 이제 은퇴하고 30년 만에 다시 수종사에 와서 그때 그 자리에 서서 지난 온 날들을 회상해 본다. 200년 전 이 자리에서 다산이 자신의 인생을 회고했듯이 나 또한 다산의 나이가 되어 나의 지나온 인생을 회고한다.‘그래, 어떻게 살아왔어?’스물여섯 살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묻는다. 궁금했다는 듯이.